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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밤 Jan 22. 2023

나의 아슬아슬 도착하기의 역사

아무래도 젊은 신체가 뒷받침해 줬기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나의 아슬아슬 도착하기의 역사는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집은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도보 10분 거리였는데, 언덕배기에 있었던 집에서 뛰어 내려오면 가속도가 붙어 엄지발가락이 운동화 앞코를 뚫을 만큼 힘차게 뛸 수 있었다. 몇 번의 연구 끝에 찾아낸 최단거리 지름길로 골목들을 드리프트해서 가면 학교 정문까지 5분컷도 가능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릎과 발목 관절에 퍽 무리가 됐겠다 싶고, 지나가는 차나 사람에 부딪치지 않길 천만다행이다. 그 정도 속도였으면 무언가 왔어도 제대로 멈추거나 피하지 못했을 테다. 그때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던 시기였다.


겨울에 젖은 머리로 나가면 머리카락이 얼어서 빗질할 때 눈송이 같은 얼음이 빗겨져 나오는 걸 경험해 본 적 있으신지. 고등학교 시절은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아침밥을 먹고, 마지막 한 입은 삼키지도 않고 우물대며 자전거로 겨울바람을 갈랐다. 언 머리카락을 접으면 바삭한 소리가 나는 게 재밌었다 (아이고 내 머릿결 상하는 소리 들리네). 차가운 겨울바람에 숨을 학학대며 도착하면 뱃속은 찬 공기로 가득하고 볼과 코끝은 빨개져서 군밤장수 같았다. 친구들 목덜미에 찬 손을 갖다 대곤 “오늘도 세이프!”를 외치며 파핫핫 웃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다녔을까? 신기한 건 그러고 다니면서도 어지간하면 제시간에 도착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몇 번 늦었어야 ’이러면 안 되는구나!‘ 하고 일찍일찍 다녔을 텐데, 어떤 순간에도 쫀득한 다리 근육이 열심히 펌핑해 준 덕에 안 늦고 말았던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각하는 건 또 무지 싫어해서 어쩌다 늦게 도착하면 한참 동안 기분이 안 좋았다. ’지각하면 기분 안 좋은 나‘와 ’밍기적대며 늦게 출발하고 싶은 나‘가 너무 강력해서 ’이동하는 나‘가 어떻게든 애써준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차곡차곡 쌓아온 아슬아슬 도착하기의 구력은 견고해서,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았다. 9시에 시작하는 경영대 수업을 가기 위해서는 학교 앞 횡단보도의 8시 51분 초록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진 않았겠지. 그래도 일을 시작하면서는 늦으면 경력에 흠이 되니까 배경화면에 열차 시간표를 띄워두고 10분 전에는 도착하도록 갔다. 사실 배차가 한 시간에 세 대밖에 없어서 10분 전에 도착하거나 지각하거나였다. 덕분에 사람들이 내가 성실한 줄 알았다. 참 다행이다.


왜 나의 아슬아슬 도착하기의 역사를 이렇게 구구절절 적었냐 하면, 오늘 설맞이 고향에 가려고 KTX를 타러 왔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따끈한 호두과자도 한 봉다리 야무지게 사서 자리에 앉았는데도 10분이나 남았다. 패딩도 둘둘 말아 짐칸에 올려 두고, 두 자리에 하나 있는 콘센트를 선점해 휴대폰을 충전해 두고, 잘 탔다고 가족들에게 연락했다. 목에 피맛도 안 나고, 느긋한 이 기분이 낯설고 좋았다. 항상 나와 함께 무엇을 타러 가면 같이 뛰느라 고생한 친구들 생각이 났다. 어떻게 또 안 놓치고 탔냐고 대단하다고 말해주던 친구들… 이제는 그 말 안 하게 해 줄게.


그래서 말인데, 올해의 목표는 ‘5분 전에 도착하기’다. 글을 쓰며 돌아보니 아슬아슬 도착하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젊은 신체가 뒷받침해 줬기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제 머리를 안 말리고 밖에 나가면 여지없이 감기에 걸린다. 무릎과 발목 관절도 백세까지 써야 하니까 살뜰히 아껴 써야 한다. 반쯤은 농담이고, 무엇보다 이제 쫓겨 사는 것이 버겁다. 회사에서도 일의 마감에 쫓겨, 쌓이는 연차와 그에 못 따라가는 것만 같은 실력에 쫓겨 사는데 약속 시간에까지 쫓겨 1분 1초를 뛰어다니고 싶지가 않다. 아슬아슬 도착하기가 주는 다이내믹과 짜릿함은 어린 날의 추억으로 남기고, 이젠 느긋느긋 도착하기를 시도해보려 한다.


5분이면 지하철 하나 놓쳐도 아무렇지 않게 다음 거 탈 수 있는 정도는 될 거다. 내가 항상 아슬아슬하게 지내며 아쉬웠던 시간도 딱 5분이었으니까. 글을 쓰다 보니 동해 바다가 차창으로 보인다. 이제 집에 다 왔다. 다행히 오늘은 구정이고 새해 다짐 하기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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