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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Dec 27. 2021

언니에게

삶을 바꿔 놓는 인연

언니,

나의 30대는 언니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과자 부스러기로 연명하며 목숨을 부지하듯 겨우 먹고살던 나에게 언니는 매주 점심을 잔뜩 차려 놓고 나를 배불리 먹여줬지. 나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민낯을 낱낱이 공개해도 언니는  판단하지 않았어. 오히려 " 나랑 닮아도 어쩜 이렇게 닮았니. 지금 너의 고민들이 너에겐 너무 힘겨운 일이겠지만, 나는 그런 너를 보며 너무 예쁘기만 .  그때를 통과했던 나를 바라보는 기분이야. 내가 지금 애쓰고 힘겨워하는 너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듯 하나님도 그때 나를 그렇게 아름답게 바라보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 나는 너를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아."라고 했던 언니.


때때로 아이들이 다투기도 해서 흔히 말하는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될뻔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난 언니를 믿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과 감정들을 가장 진실이 털어놓을 수 있었고, 언니 또한 나를 믿었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에 잠식되지 않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어.


언니를 바라보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정말 많이 배워. 언니라고 왜 할 말이 없었겠어. 언니라고 왜 억울하지 않고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지 않았겠어. 하지만 언니는 한없이 자기를 없애는 사람이야. 그래서 더 멀리멀리 뿌리내리는 사람이지. 그런 언니가 나를 보고 "넌 나를 정말 많이 닮았어"라고 할 때마다, 나에게도 어쩌면. 정말 어쩌면. 조금은 소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언젠가 언니가 마음을 나누다가 내 앞에서 펑펑 운 적이 있었지. 모범생처럼 살아오던 언니가, 왠지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고. 그래서 힘들어도 잘 극복하는 모습만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너무 외로웠다고. 그런데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너무 좋다고. 그렇다고 이제까지의 언니의 모습이 하나도 거짓은 아니었지만, 언니가 나에게 부담이 될까, 실망이 될까 힘들 때도 씩씩하게 웃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 그리고 언니가 이제는 나에게 그런 부담까지 털어놓으며 힘들 때는 힘들다고, 모르겠을 때는 모르겠다고 더 솔직히 말해줘서 나는 그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내가 그랬잖아. 언니를 만날 때마다, '이 언니는 사람 맞나? 힘들지도 않나? 나랑은 정말 다른 차원의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언니가 언니의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비로소 정말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고.


언니, 내가 요즘 읽은 책 중에 <밝은 밤>이라는 소설이 있어. 거기에 삼천이랑 새비라는 인생친구가 나오는데 새비가 삼천이한테 그러더라.


"내가 집에 가는 길에 서럽다, 서럽다 하니 삼천이 너가 그랬지. 서럽다는 기 뭐야. 나 기 말 싫구만. 너레 화가 나믄 화가 난다고 말을 하라요. 나한테 기런 말두 못하무 내가 너이 동문가. 그래서 마당에 앉아 내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럽다는 말이 거짓 같았어. 서럽긴 뭐가 서럽나. 화가 나지. 삼천이 너가 그러지 않았어. 섧다, 섧다하면서도 화도 한 번 내보지 못하구 속병 드는 거 아니라고, 그 말을 나 생각해." (p. 127)

언니,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돼. 기런 말두 못하믄 내래 언니 동무냔 말이야. 언니랑 함께 보고 싶은 페이지들을 꾹꾹 접어 놓았어. 이따 만날 때 줄게.


그날 언니가 나한테 언니의 진심을 공개한 이후로, 나 언니 만날 때마다 노브라로 만난다? 내가 노브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일 거야. 난 누군가랑 단둘이 2시간만 얘기하면 기가 쏙 빨려서 집에서 또 2시간을 누워있어야 하는 사람인데, 언니랑은 하루 왠종일을 얘기해도 오히려 더 충전이 되는 기분이 들어. 그 이유를 두고 언니가 "우리는 주파수가 맞아서 그래"라고 했지. 어딜 가든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내가, 언니 집에 가면 내 집처럼 밥솥에서 밥도 퍼먹고, 널브러져 책을 읽기도 하고, 얘기하다 졸리면 소파에 벌러덩 누워 자기도 한다니... 그것만으로도 우리 관계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시사하는 거 같아.


언니가 남편 다음으로 자신을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했을 때. "그게 윤승이 너더라"라고 말했을 때 내 가슴은 왜 그렇게 뿌듯했던 걸까. 언니가 나를 이해해주는 만큼, 언니 또한 나에게 이해 받음으로 위로받고 있음을 고백했을 때, 내 안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어. 우리는 참 많은 삶의 터널들을 함께 통과해왔지. 그 순간들이 출구 없는 막막한 동굴이 아니라 결국은 헤쳐 나온 터널이었다는 것이. 우리가 서로의 서사 속 증인이 되어준다는 것이.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나에게 "새비"가 있다는 게. 온 세상을 준다 해도 쉬이 얻을 수 없는 인연이 내 삶에 있다는 게. 새삼 감사했어.


언니, 난 언니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아. 사랑을 받았고, 헤아림을 받았어. 언니는 나보다 우리 집 아이들을 더 사랑의 눈길로 바라봐주더라. 시온이가 한창 껌딱지라 내가 너무 자책하며 힘들어했지. "언니, 얘는 대체 왜 이러지? 앞으로 어떻게 되려고 이럴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라고 말하면 언니는 "시온이가 너 하나만 보고 온 맘 다해 매달리듯, 얘는 나중에 예수 한분만 보고 온 맘 다해 달려가는 애가 될 거야. 얘는 그런 근성이 있는 애야, 내가 알아." 이렇게 선포까지 해주었지. 도대체 얼마나 사랑의 눈으로 봐야, 남의 자식인데 그 엄마도 못 보는 걸 봐줄 수 있을까. 그때부터 시온이를 대하던 엄마로서의 나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던 거 같아. 지금 당장 나를 힘들게 하는 행동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행동을 가능케 하는 아이 고유의 천성을 축복하고 그 너머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이야.


언니, 언니 앞에서 나는 실수해도 괜찮은 사람이 된다.

부족해도 충분하다고 여겨짐을 받는 사람.

잘못해도 용서를 받는 사람.

내가 무슨 짓을 한들 "걔는 그럴 리 없어"라고 나를 무조건 믿어 주는 사람.

이 세상에 그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나는 요즘 정말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내가 누구에게서 이런 사랑을 받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나 또한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관계의 사계절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항상 여름처럼 뜨겁고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기만 하는 관계라면 좋을 것 같아도 오히려 다 타버린 사막이 되어버리고 말겠지. 언니 기억나? 내가 언니를 만난 지 딱 1년 되던 날 언니 집 앞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잖아. 그때 언니가 수줍게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박장대소를 했지. 지금 이렇게 언니에게 쓰는 편지도 꼭 연애편지 같아. 언니를 향한 내 마음은 늘 봄날 같지만, 우리는 폭풍우 같던 여름도, 잠시 뜸해졌던 겨울도 지나 이제는 열매 맺는 가을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어. 우린 그런 사계절을 여러 번 여러 번 통과해서, 견고하고 단단하게 모든 것을 품어내는 고목나무가 되어 가나 봐.


우리도 나중에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둘이 꼬부랑 할머니들이 돼서 삼천이랑 새비처럼 서로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줄 수 있겠지? 그때도 내 옆에 언니가 있을 수 있다면, 난 참 잘 산 인생이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 충분하다, 흡족할 거야. 언니 고마워. 언니는 나 밖에 모르던 내 삶에 일어난 희박한 기적이야.



•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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