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홍당무가 만나게 된 이야기]
홍당무: “안녕. 네가 토끼지?"
홍당무: "내가 홍당무야. 일찍 왔네?”
스물다섯이라고 한 홍당무의 첫인상은 십 대 소녀 같았다.
밝고 매력적인 미소에 나는 약간 주눅이 들었다.
토끼: “안녕, 너도 일찍 왔는걸. 네가 먼저 메시지 보내 줘서 고마웠어.”
홍당무: “내가 다닌 학교에 입학한다니, 대단한 우연이다. 그렇지?”
런던에 도착한 뒤, 제일 먼저 인터넷으로 영어 선생님을 찾았다.
홍당무는 내가 합격한 학교에서 같은 전공을 공부했고, 한국어를 배우려는 영국인이었다.
취미로 여러 가지 언어를 공부하고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요리를 좋아하는 홍당무는 호기심이 넘치고, 다재다능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 애를 만날 때면, 저기 멀리서부터 따스한 빛 뭉치가 나에게 팔랑거리며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았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만나 노을처럼 밝고 따뜻한 빛이 났다.
나는 나이만 몇 살 많을 뿐. 그 애처럼 능동적이지도, 화사하지도 않은 인간으로 느껴져서 평소보다 더 수줍어하고 쭈뼛거렸던 것 같다.
우리는 트래펄가 광장 근처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같이 공부했다.
토끼: “와, 너랑 진짜 똑 닮았다! 동생이야? 다들 오렌지색이네. 닮았다. 많이.
어…… 그런데 네 눈 색만 다르네?”
홍당무: “응, 혼자 튀지? 내 눈은 외할머니 나나를 닮았어.
머리카락은 다 오렌지색이라 별명이 다 캐럿, 펌킨. 그랬어. 지겨운 주황색…….”
홍당무의 이름은 캐럴라인이었다. 줄여서 캐럴.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놀림거리가 되기 시작하면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녀는 항상 캐럿, 홍당무로 불렸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은 영어권 문화에서 부정적인 인상이 있다.
서구권에는 적발의 여성은 문란하다는 편견이 있고, 옛날 뱃사람들 사이에서 붉은 머리는 불운을 불러온다고 미신도 있었다.
한국인은 거의 비슷한 색상 팔레트를 가졌다.
나는 피부색이나 머리 색으로 인한 수많은 오해와 선입견들에 대해 무지했다. 서른 살이 되도록 지구 한편에서는 머리 색이 빨갛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게 유년 시절부터 콤플렉스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도.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에 무척 서툴렀고, 에둘러 말하는 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때로는 ‘방금 내가 뭘 말한 거지?’ 싶은 이상한 단어와 문장들이 툭 튀어 나왔다.
예를 들면,
홍당무: “어릴 때 너희 집은 분위기가 어땠어?”
토끼: “아…… 어…… 아빠가 엄마를 때렸어. 술 먹고. 아주 자주.”
홍당무: ???
토끼: “아…… 그게……”
둘 다: ……
이런 식이었다.
홍당무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때때로 홍당무는 목이 아프다고 했고, 햇빛이 너무 강해서 눈이 따갑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종종 우리의 수업은 중단되기도 했다. 나는 홍당무의 표정을 더 자주 살피게 됐다.
토끼: “괜찮아?”
홍당무: “으으, 눈 따가워. 킁킁…… 이게 무슨?”
토끼: "우아"
홍당무: "와!"
토끼: “개한테서 저런 향이 나다니…… 보호자 엄청 사랑을 주면서 키우나 봐. ”
홍당무: “향기는 순식간에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토끼: “그러게…… 강아지 샴푸 향 하나에 이렇게 많은 생각이 들다니…….”
홍당무: “우리가 자각하지 못할 뿐 후각은 어쩌면, 시각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거 아닐까?”
홍당무: “저 강아지들,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는 걸 향기로 알 수 있잖아.”
토끼: “너? 너 엄청나게 사랑받고 곱게 자랐을 것 같은데. 그런 이미지야.”
홍당무: “내가? 아니……. 그다지.”
홍당무: “내가 자란 집에는 쓰레기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었어. 학교에 갈 때마다 교복이 더러워질까 봐 무릎 높이까지 따라오는 쓰레기들을 걷어차면서 나와야 했어.”
토끼: “몇 살부터 그렇게 지냈는데?”
홍당무: “일곱 살부터 십 대 시절 내내, 여동생이랑 아빠랑 셋이서 살았어. 부모님이 어릴 때 이혼하셨거든. 엄마가 새로 결혼한 분과 아기를 낳아서 남동생이 하나 더 있어. ‘조’라고. 엄청 착한 애야, 사진 보여 줄까?”
토끼: “그래.”
홍당무에게 예상하지 못한 유년 시절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나의 유년기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토끼: “와 진짜 귀여워.”
홍당무: “그치? 진짜 특별한 애야. 스무 살이 넘었는데, 아직도 요정 이야기를 믿어.”
토끼: “그게 가능하 일이야? 우아.”
나에게도 홍당무에게도 가족에 관한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인종이, 국적이, 자라 온 환경이 달라서 서로를 조금은 덜 경계했던 걸까?
아니면 서로의 서툰 언어가 우리의 대화를 보통의 관계처럼
매끄럽고 안전하게 다듬을 여유가 없던 것일까?
마음을 열고 자신의 기억 조각들을 나에게 나누어 준 홍당무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