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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Mar 18. 2024

일본의 쉰들러 스기하라 치우네

깨알 상식 일본

일본의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1908∼1974라고 불리우는 스기하라 치우네杉原千畝.1900∼1986라는 한 외교관의 이야기입니다. 쉰들러는 허리우드의 유태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1994’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체코 태생인 쉰들러는 독일인 사업가로 그 자신이 나치당의 당원이기도 했습니다. 사업할 때는 저임금으로 많은 유태인들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치에 의한 유태인에 대한 가혹한 학대, 특히 가스실 대량 살육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 충격으로 유태인 착취에서 구출로 급선회하게 되었고 전재산을 처리하여 유태인 구출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유태인들에게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가재도구까지 모두 팔아가며 유태인 구출에 힘을 기울인 쉰들러는 결국 모든 재산을 유태인 구출에 소진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완전 파산하여 빈털터리가 되었으나 그의 헌신을 잊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생활비는 물론 아예 이스라엘에 주거지까지 마련해 주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독일과 이스라엘을 오가며 생활하다 이스라엘 땅에 묻혔습니다.

스기하라도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기후현岐阜県 출신인 그는 와세다대早稲田大를 중퇴하고 공직에 들어와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걷습니다. 재학중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여 졸업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외무성에 입성한 1924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중국 하얼빈에서 러시아 귀족 여성과 결혼했으나 10년후 이혼하고 이듬해 일본 여성과 재혼했습니다. 


그가 유태인을 구출하게 된 것은 소련 인접국 리투아니아에서 영사로 근무할 때인 1940년의 일입니다. 1938년 히틀러의 암묵적 승인하에 자행된 유태인에 대한 무차별 폭력과 파괴, 약탈이 대규모로 발생한 ‘수정의 밤Kristallnacht‘ 사건을 기점으로 유태인에대한 박해가 날로 심해져 신변의 불안을 느낀 독일내 유태인은 국외로 이주를 도모합니다. 

더우기 이듬해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의 여파로 수많은 폴란드 사람들은 전화를 피해 국외로 탈출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우선 인접국 리투아니아로도 많이 피신했습니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당시의 소비에트 연방국–소련)에 합병되었고 이로 인해 소련은 리투아니아 주재 외국 공관 퇴거를 명했습니다. 소련의 명으로 대부분의 외국 대사관이 철수하였으나 일본대사관은 즉각 철수하지 않고 업무를 이어갔습니다.


일본대사관만은 집무를 이어간다는 소문이 돌자 유태인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유럽을 탈출하여 다른 대륙으로의 이주를 갈망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계속 유럽에 머물다가는 나치독일에 의해 희생될 것이 명약관화했습니다. 해로海路를 통한 탈출길도 막혀 있었습니다. 외국으로 탈출하기 위해서는 해당국의 입국 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유태인에게 순순히 비자를 내어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일단 일본으로 피신한 후 사태의 추이를 보아 다른 대륙으로 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본은 리투아니아에서 공관 업무가 끊기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유태인들은 일본 입국 비자를 신청하려 영사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다급해진 영사관은 본국에 보고했고 외무성은 비자 발급 불가를 명했습니다. 이미 독일과 우호 협정을 맺고 있던 일본은 독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반유태주의 사상을 익히 알고 있던 일본은 이를 의식해 입국 비자 발급 불허 지침을 내린 것입니다. 더구나 비자를 신청하려던 유태인 성당수는 비자 취득 자격 미달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리투아니아 영사 스기하라는 외무성의 명을 어기고 유태인에게 비자를 발급하기로 했습니다. 

스가하라는 일본 입국을 신청한 유태인에게 입국 비자를 내어 주었고 심지어 자격 미달자에게까지 발급했습니다. 한 사람의 유태인이라도 더 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스기하라는 자신의 경질이나 문책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사기로의 절대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던 유태인을 돕기로 한 것입니다. 

주리투아니아 일본대사관이 유태인에게 일본 입국 비자를 발급해준다는 소문이 돌자 유럽 각지의 유태인들이 리투아니아의 일본대사관으로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스기하라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자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대부분이 가족 단위의 신청자들이었습니다. 

비자 획득에 성공한 유태인들은 곧바로 소련을 횡단하여 시베리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는 길고도 먼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외무성이 비자 발급 중단을 명했어도 스기하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 유태인을 구출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비자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구한 유태인수는 6,000명으로 추산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스기하라는 리투아니아의 일본대사관을 떠나며 아예 직인 도장을 유태인에게 넘겨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스기하라로부터 일본 입국 비자를 받은 유태인들은 멀고 험한 길을 거쳐 결국 일본 입국에 성공했고 고베에 모여 살며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습니다. 고베는 개항장으로 국제적인 도시였고 이미 입국한 유태계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재일 유태인들은 고베에 거주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주로 미국과 이스라엘을 목적지로 하여 일본을 떠났습니다. 남아있던 유태인들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미국으로의 직접 이주가 불가능하게 되어 중국 샹하이에 있던 유태인 조계지로 옮겨갔습니다. 스기하라는, 또 일본은, 그들에게 있어 생명을 구해준 고마운 은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스기하라의 도움을 잊지 않고 국민훈장을 수여함으로 감사를 표했고 유태인의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였습니다. 스기하라의 묘는 쉰들러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구출된 유태인들의 감사에도 불구하고 스기하라는 명령 불복종으로 외무성으로부터 심한 문책을 당하게 됩니다. 엄격한 상명하복의 일본 관료 사회에서 정부의 명을 어긴 외교관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처벌을 받아 1947년 외교관의 옷을 벗게 되었고 불명예 퇴직으로 연금 대상에서까지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흐른후 국제 평화에 이바지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명예가 회복되었고 연금 수혜 대상도 되었습니다. 미망인이 된 부인에게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스기하라가 유년시절 10년을 보낸 나고야에 ‘스기하라 치우네 인도의 길杉原千畝 人道の道’과 기념 광장 ‘센포 스기하라 메모리얼千畝杉原メモリアル’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스기하라 치우네 광장’이, 네타냐에 ‘스기하라 거리’가 조성되었고, 고향 기후에 ‘스기우라 치우네 기념관’이 설치되었으며 리투아니아는 그의 집무실을 기념관으로 보존하며 평화와 인류애를 알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일본에도 6,000명의 유태인을 구하며 인류애를 표방한 평화주의자 스기하라 치우네가 있었다’는 사실을 국제 사회에 홍보하며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 형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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