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열제로 우식이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새벽 3시 알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일어났다.
침대 맡에 준비해 둔 타미플루 10cc를 들고 우식이 이마를 한번 짚어 보았다.
이렇게 뜨거울 수가 있는 건가.
귀에 체온계를 넣어서 재 보니 40도다.
40도는 안돼. 이건 너무 높아.
열 기운에 우식이가 깼다. 얼마나 몸이 힘들까.
“약 먹어야 되는데 일어날 수 있겠어?”
“엄마 나 약 너무 많이 먹어서 그만 먹고 싶어.”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하는 말이 약을 못 먹겠단다.
우식이는 그런 아이다.
자신을 보호하는 게 중요하다.
눈앞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다.
어린아이니까 당연한 것이지만
이제는 잠깐의 고통을 감수하고 유익한 일을 선택할 때도 되지 않았나.
일단 아이를 설득했다.
설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반 만 먹어. 반 만먹고 생각해 봐. “
아이는 반을 먹더니 이내 나머지 반도 금방 먹는다.
여전히 40도.
30분만 있다가 해열제도 먹여야겠다.
우식이가 제일 싫어하는 약의 종류가 해열제다.
액체이지만 약간은 젤리 같은 쉽게 넘겨지지 않는 꾸덕꾸덕함.
어릴 때도 해열제를 먹다가 게워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그 종류가 입에 들어올 생각만으로도 비위 상해한다.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서 결국 해열제를 먹이려고 깨웠다.
“열이 너무 높아. 해열제 먹어야 할 것 같아.”
“엄마 나 해열제 안 먹어. 안 먹고 기다릴 거야.” 이제 눈물이 흐른다. 자기가 열을 이긴다고.
어떻게 이렇게 몸이 뜨거운데 그 해열제를 안 삼키려고 할까.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우식아. 이거 반 만 먹자. 반이라도 먹어.”
우식이는 반이라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먹었다. 전부라면 못 먹을 양이라 판단해 버려서 입도 안대지만 반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먹는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수 백번을 이야기해도 검토하지 않는 아이의 습관이 생각났다. 수학문제를 대할 때마다 작은 실수로 오답을 내기에 남편과 나는 검토하는 법을 수없이 주문했다.
훈계, 달래기, 충격요법 등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본 것 같아 마지막으로 아이의 버릇을 고쳐주려고 마주 앉았던 식탁에서 아이는 울면서 말했다.
“ 검토 안 할 거야. 내 방식으로 맞출 거야.”
나는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왜 이렇게 꼴통같이 구는 거지. 너 누구 닮아서 이래! ’
알 수 없었던 그 마음이 해열제를 대하는 아이의 태도를 보니 갑자기 깨달아졌다. 고열에 시달리면서 너무 많아 보이는 해열제 양을 보고는 뻔한 답을 두고도 답이라 생각하지 않는 아이. 차라리 열이 펄펄 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을 잃어서 고열을 끙끙 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에 잡히지 않는 과제를 주면 이리저리 부딪혀서 해내며 성취감을 얻는 아이가 있다면
우식이는 손에 잡히지 않는 과제를 보면 지레 겁먹고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아이였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았다. 이건 내 탓인 것 같았고.
다행히 열은 내려 37도 주변을 맴돌고 아이도 기력을 찾았다. 이틀 만에 만지는 차가운 우식이 볼이다.
“엄마 나 게임하면 안 돼?” 실실 웃으며 기운이 돌아온 티를 내는데 왠지 오랜만에 보는 모습 같아 반가웠다.
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의 종류가 3가지라 본의 아니게 약 먹는 일에 자신감을 얻은 우식이.
식탁에 먹어야 할 약을 올려놓고 말해주니 한 시간쯤 버티다가 스스로 먹어서 비워놨다.
아픈 만큼 원래 성숙하는 거니까
엄마도 우식이도 독감에게 배워 성숙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