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는 나름의 화제성이 존재했다. <검은 사제들> 이후 사제복을 입는 신부 캐릭터는 미디어 매체에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고, 당시 사람들은 박소담의 소름 돋는 연기를 패러디하기도 했다. <사바하>는 감독의 전작에 비하면 화제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만의 색다른 면모는 존재했다. 두 종교의 뒤섞임과 한국적인 공간적 배경의 낯섦에서 오는 공포감은 꽤나 흥미로웠다.
장재현 감독의 두 작품은 선악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는 영화의 소재가 종교라는 점에서 나온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종교와 선악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종류이니 말이다. 두 영화는 선악이라는 키워드는 공통적이나, 각각 보이는 선악의 모습은 다른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큰 흐름에 빗대어 보았을 때 유의미한 결론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영화는 선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장치를 잘 이용한다. 이야기 속에서 죽음은 굉장히 극적인 장치로, 남발하면 관객에게 피로감을 줄 수 있는 요소이다. 하지만, 감독은 죽음의 의미를 타당하게 설정하였고 이는 결국 영화의 선악의 주제가 분명하게끔 도와준다.
*영화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각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이야기해보자면, <검은 사제들>은 장미십자회에 등록되어 있는 12 형상 중 하나의 악이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외국 구마사제들은 퇴마를 하다 최종 단계에서 실패하고, 이 악은 한국의 고등학생, 영신(박소담 분)에게 들어가게 된다. 영신을 구하기 위해 김신부(김윤석 분)는 퇴마를 시도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보조 사제가 구마 의식을 포기한다. 그리고 다음 보조사제로 최 부제(강동원 분)가 선택된다. 이들은 악령에게 휩싸이기도 하지만, 영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구마의식의 최종 단계까지 성공하게 된다.
<사바하>는 금화(이재인 분)와 박 목사(이정재 분)의 이야기가 얽히며 진행된다. 금화는 '그것'(이재인 분)과 함께 태어나고 정착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박 목사는 이단을 쫓다 불교 이단으로 보이는 사슴동산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사천지왕이 부처인 김제석을 보호하기 위해서 99년생 여아를 지속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나한(박정민 분)은 진실을 깨닫고 김제석을 죽인다. 나한은 사명을 다했다는 듯 죽고, 일련의 사태를 목격한 박 목사는 읊조리며 신에게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진다.
각각의 영화에서는 많은 죽음이 나온다. <검은 사제들>은 영화 전개 내내 죽음이 꾸준히 등장한다. <사바하>는 전개 내내 등장하지는 않지만, 영화 후반부에 많은 죽음들이 등장하고 전개 속에서 죽음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검은 사제들>에서 나타난 죽음들을 차례대로 나열해보자면, 외국 구마 사제들의 죽음, 정 신부(이호재 분)의 죽음, 영신의 죽음, 돼지의 죽음이 있다. 이 중 초반의 죽음에 해당하는 외국 구마 사제들과 정 신부의 죽음은 유사하다. 이들은 구마 의식을 시도했고 실패하였다. 즉, 구마 의식의 실패가 죽음으로 이어진 것으로 실패는 죽음이라는 의미가 된다. "실패=악=죽음"의 의미를 반대로 생각하면 "성공=선=삶(생존)"이라는 대립 항이 도출된다. 이러한 관점은 실패와 성공을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본 것이다.
<검은 사제들>에서의 돼지의 죽음은 이 영화의 종결이나 마찬가지다. 악의 소멸이자 퇴치이기 때문이다. 검게 변한 돼지는 악한 기운을 내뿜는다. 악은 구마 의식을 행한 구마 사제들의 목숨을 계속해서 위협한다. 최 부제는 이 악한 돼지와 함께 한강에 빠진다. 물로 악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까마득히 어두운 강물에서 돼지는 죽고, 최 부제는 살아남아 물 위로 올라오게 된다. 돼지의 희생적인 죽음과 최 부제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대조된 모습이다. 결국, 돼지의 죽음과 최 부제의 생환은 구마의식의 완전한 성공을 의미하게 된다.
검은 물에서 밝은 빛을 향해 가는 최 부제
<사바하>는 후반부에 많은 죽음이 나타난다. 또한, <검은 사제들>과 달리 이미 사망한 피해자들의 이미지가 영화에 등장한다. 사천지왕인 김철진(지승현 분)과 정나한은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피해자들의 환영을 계속해서 본다. 이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천지왕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이다. 사천지왕에게 있어서, 99년생 여성을 살해하는 행위는 신(부처)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상황이라는 점이다. 사천지왕은 죄책감이라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신을 지킨다는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모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독실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살인이라는 죄악은 신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에 사라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살인이라는 사천지왕들의 죄악은 왜곡된 종교적 믿음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이들의 왜곡된 믿음은 어떠한 행위를 선과 악으로 구분 짓는 것이 관점에 따라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 나한은 진실을 깨닫는다. 진실을 깨닫게 된 나한은 김제석을 죽이고 나서야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사명(죗값)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나한의 죽음은 <사바하>에서 말하고자 했던 주제 중 하나를 관통하고 있다. 나한은 무고한 이들을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으나, 결국 자신의 믿음인 악 소멸과 부처를 지기키 위해 노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진정한 사천지왕으로 거듭난다.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에서는 비슷한 이미지의 죽음이 등장한다. 바로 영신의 죽음과 '그것'의 죽음이다. 영신과 그것의 공통점은 성년이 되지 못한 여자, 소녀라는 점과 평안과 희생의 의미를 지닌 죽음이다. 차별점은 '그것'이 영신보다는 좀 더 능동적인 캐릭터라는 점이다.
차별점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영신은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소녀로, 구원자인 구마사제들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비교적 능동적인 편이다. '그것'은 자신의 핏줄인 금화를 구하기도 하고, 나한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적극적으로 김제석을 처단하지 않고 수행자(대리자)인 나한을 필요로 한다. 영신과 '그것'은 결국 도움이 있어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이들의 죽음은 평안과 희생을 의미한다. 영신이 사망하는 장면은 영신의 눈이 클로즈업된 씬으로 이루어진다. 영신의 눈은 검은 자만 가득 찼다가 흰자가 생기고 눈을 감는다. 이는 영신을 괴롭게 하던 악령이 영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며 그녀가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영신은 죽기 전 악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붙잡으며 김신부에게 “신부님, 제가 잡고 있을게요.”라고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플래시백을 통해 영신이 이러한 말을 했음을 보여주며, 영신의 성녀 이미지를 강화하며 희생적 죽음을 강조한다.
악에 잠식되어 있는 눈 클로즈업 장면사바하에서 ‘그것’은 악에 가까워진 김제석과 대치하는 나한의 상황을 다른 장소에서 읊으며 초월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김제석과 상호의존적 관계를 취하고 있다. 나한이 ‘그것’의 명령대로 김제석을 죽이자, ‘그것’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불교의 연기설("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이 멸한다.")에 기반한 죽음의 형태이다. ‘그것’과 김제석은 연결되어 있지만, 정반대의 캐릭터이다. ‘그것’은 본디 악에 가까웠으나 최후에는 부처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반대로 김제석은 부처의 문턱에서 좌절한, 악에 가까운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김제석이 초반부의 ‘그것’처럼 새까맣게 변해 죽은 모습이 그가 타락했음을 강조한다. 또한, 둘은 누워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눕는 방향이 반대된다. 마지막으로 김제석의 곁에는 죽음을 슬퍼해 주는 이가 없지만, ‘그것’의 곁에는 금화가 있다는 점이 상반되어 나타난다.
결국, ‘그것’과 영신은 악 소멸을 위해 희생하는 성녀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영신이 평안을 얻었음을 눈을 통해 보여주고, ‘그것’은 금화의 품에서 웃으며 죽음으로써 평안을 얻음을 보여준다. <검은 사제들>의 영신은 영화 초반부에서 말에 이르기까지 선이었다. 이는 영신이 김신부에게 던지는 대사 "신부님, 제가 잡고 있을게요"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바하>의 ‘그것’은 악한 존재로 태어나 남들에게 불행을 주다가 깨달음을 얻고 초월적인 존재가 된다. 따라서, <사바하>에서는 태초부터 악인 것처럼 형상을 띈 것도 선이 될 수 있다는 <검은 사제들>과는 다른 선악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
<검은 사제들>에서는 여러 죽음을 통해 선악의 경계를 뚜렷하게 만든다. 영화 전개 내내 악은 끝내 악으로 소멸하고, 선은 끝내 선으로 끝맺는다. 영화에서는 악의 존재가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사바하>에서는 극 초반에는 ‘그것’이 악으로 보였다가 후에 선에 가까워진다. 김제석은 과거에는 선에 가까운 초월적 존재였으나, 불멸에 대한 욕망으로 타락하게 된다. <사바하>에서는 악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만, 악과 선이 언제든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가 개봉된 시기는 각각 2015년 11월과 2019년 2월이다. <검은 사제들>은 당시 낯선 소재임에도 화제성과 흥행에 성공한 편이다. 어떻게 관객들에게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걸까? 영화 개봉 1년 전인 2014년에는 한국에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었다. 학생들을 비롯한 관광객들이 사망한 사건이다. 2015년 5월쯤 메르스 사태로 인한 피해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컸다.(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메르스 환자가 많았었음.) 당시 한국 사회는 사고와 질병으로 인해 혼란스러웠고, 책임자에 대한 정보 전달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악은 당시 한국 사회에 존재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책임자는 사람들이 서로를 탓하게 만들며 혼란을 가중한다. 혼란 속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고, 악을 물리칠 선을 찾는다. 한국 사회의 혼란함 속에서 이 영화는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흥행에 성공했다. 보이지 않는 악에서 구원자가 나타나 끝내 악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사바하>가 나온 2019년까지 한국 사회는 여러 사건이 있었다. 국정농단으로 인한 촛불집회, 미투(성폭력 고발 운동)의 시작까지. 3년간 한국 사회는 급변하며 사람들의 대립적인 모습이 두드러졌다. 여러 대립은 서로를 상처 입히고 갈등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이 대립들을 지켜보면 선과 악이 따로 나뉘어 있지 않다. 촛불집회와 그에 반대되는 태극기 집회는 ‘애국’이라는 궁극적 목표가 같다. 미투 운동의 시작은 범죄라는 악을 소멸하려고 한 것이나, 혐오라는 새로운 악을 부풀리기도 했다. 수많은 대립 속에서 서로를 향한 혐오와 비난은 사회 문제로까지 인식이 되었다. 하지만, 그 대립 속 “누군가가 나쁘다”라고 정의 내릴 수 없다. 선악이 이전과는 다르게 인식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이는 <사바하>에서도 녹아들어, 언제든 선악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과거의 이분적인 관습을 깨트렸다.
<검은 사제들>에서는 한 비극에서의 책임자가 불분명함에 대한 분노와 언제든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한국 사회의 두려움이 비가시적인 악령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선이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바하>에서는 한국의 대립 속에서 나타난 분노와 서로를 향한 혐오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려 한다. 서로를 향한 혐오가 누군가에게는 악일 수 있고, 선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바하>는 좁게 보면 종교 이단에 대한 비판적 물음에 그칠 수도 있지만, 넓게 본다면 개인이 왜곡된 믿음을 갖고 타인에게 악을 행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물음까지도 던지고 있다.
최근 여러 영화에서는 선과 악을 명백하게 나누지 않는다. 주인공에 대적하는 인물도 서사를 만들거나, <기생충>(PARASITE, 봉준호, 2019)처럼 온전히 선한 인물을 만들어 놓지 않는다. 이는 사람들의 선악에 대한 의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렇듯 변화하고 있는 선악의 이미지가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에서는 좀 더 명백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