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우정, 친구

만남의 시간이 길다고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다.

by UHA

그리워

나는 학교생활이 원활하지 않았다. 성격이 지금 성인 되어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고 또래 애들이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수업 끝나갈 때쯤 선생님이 질문 있으면 하라고 하면 다들 암묵적으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수업이 길어져서 쉬는 시간이 줄어들기도 하고 엉뚱한 질문 하면 이목 집중이 되니깐, 나는 눈치가 너무 없기 때문에 엉뚱한 질문을 진짜 많이 했고, 쉬는 시간엔 엎드려 자기만 했고 친구들이 험담을 하면 듣고 흘려야 하는데 같이 맞장구를 치기고 뒤통수 당하기 일 수였다. 게다가 고집까지 강하니 옆에 누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를 '내가 왕따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왕따로 만든 거야' 이 생각으로 졸업했다.


성인 되니 고등학교 친구가 나에게 연락해 고백을 했다.

"미안해, 네가 그렇게 친구들한테 당할 때 나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어 너를 돕지 않고 지금이라도 사과해"


가끔 나랑 같이 밥을 먹어주고 다리가 아파서 휠체어 탈 때 나를 도와주던 효심이가 나에게 사과하고 먼저 다가와 줬다. 너무 고마웠고 고마웠다. 그렇게 우리는 고등학교 학창 생활 보다 더 친하고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우연히 대학교도 같은 대학교를 입학하게 되었고 학과는 다르지만 종종 만나서 밥도 먹고 고민도 나누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하영아 우리 여행 갈래?, 일본 어때?"

"진짜 너무 좋아!"


용감하고 멋진 효심이는 대학생 때부터 동남아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박사였다. 그렇게 나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해외를 가보았다. 효심이는 알아서 숙소, 티켓, 지하철 등 다 해결해 줬다. 나는 정말 효심이를 따라다니기만 해도 너무 행복했다. 너무 고맙고 정말 우리 엄마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랑하는 친구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찌들어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효심이는 모르겠지만 나는 효심이를 잊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힘들어 효심이에게 연락을 했다. 바쁜지 답장은 오지 않았고 한참 후 연락이 왔다. "미안해 내가 사정이 있어서 연락이 늦었어", 나 또한 이틀 삼일이 지나 답장을 했다. "나 역시 바빠서 답이 늦었어 그냥 네가 궁금해서 연락했어 잘 지내?", "너는 왜? 연락을 한 거야? 지금껏 연락이 없다가? 왜? 연락하는 거야?" 예민하고 뾰족한 송곳으로 나를 찔렀다. 그날 나는 무덤덤하게 넘겼다.


그렇게 일주일 후 장문의 카톡이 왔다.

사실은 대인관계로 지금 너무 힘든 상황이라 너한테 까지 불똥티 튄 것 같아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너도 자주 연락 안 하고 나랑의 관계가 그렇게 원활하지 않는 거 맞지 않느냐고 내가 싹수없는 건 맞는데 이렇게 연락하는 거 불편하다는 말을 남기고 나를 차단했다.

맞받아 치기엔 너무 오랜만에 연락한 것도 효심이의 긴 장문의 톡도 다 맞는 말이었다. 속상해서 한참 울었다.


친구라고 하지만 나는 효심이를 너무 오래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나는 좋은 추억으로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날 웃고 대화 나누고 편의점 앞에서 맥주 마시고 했던 게 너무나 선명하고 교복 입고 달리면서 시장에서 떡볶이 사 먹던 그날을 잊지 못하는데.. 정말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다.


지금이라도 효심이 집이 어딘지 기억하기 때문에 똑똑똑 문을 두드리고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 친구에게는 내가 다가 가는데 부담일 수 있기 때문에. 아직 까지도 하지 못하고 있다.



대봉

학창 시절엔 나이가 뭐가 중요하다고 한 살 차이 나면 언니 동생 철저 했는지 사회에 나오면 5살 차이고 10살 차이고 그냥 다 언니 동생이지만 이젠 친구가 된다.


우리 대봉이는 나의 쏘울 동생이다. 나랑 몇 살 차이 나는 지도 매번 물어보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5살인가? 아마 맞을 것 같다. 우리 대봉이는 내가 피와 땀과 눈물과 살과 잠과 밥을 갈아서 일할 때 만난 동생이다. 카페에서 행주를 맞아가고 육두문자를 면전으로 받고 잠도 못 자고 면역력이 떨어져 쓰러지면 서도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대봉이랑 카페에서 일할 땐 정말 인생 살면서 제일 재미있던 시기다.


대봉이는 어쩜 이리 어린데도 속은 할머니다. 이해심이 크고 생각하는 게 남들과 다르게 깊었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참 동생이 아니라 언니였다.


이마 서로의 상처를 공개하고 서로의 아픔을 이해할 때 알았다. 그건 배운 게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짬빠였다. 대봉이는 가정사가 평범하지 않았고 나였으면 정신병에 힘이 들었겠지만 대봉이는 묵묵하게 견디며 타인을 이해하는 기술을 습득한 거였다. 그리고 집안이 어려운걸 눈으로 보고 느끼며 돈을 쓰기보다는 모으는 이유가 명확했고 또래 요즘 아이들과 다르게 행동에 있어 회고를 하고 뒤돌아 보며 뉘우치는 생각을 한다는 거였다.


신기했다. 나는 부정적인 상황이 다가오거나 벌어지면 남 탓 세상탓 하기 바쁜데 어린 대봉이는 자신이 한 행동과 생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는 게 여유가 있든 없든 그런 시간을 갖는 자체가 이미 인생 선배였다.


카페를 그만두고 대봉이랑도 멀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천안과 인천을 오가면서 지금도 일 년에 몇 번은 얼굴 보고 밥 먹고 한 달에 한 번은 핸드폰이 불이 날 정도로 수다를 떤다. 참 이런 사이가 몇이나 있을 수 있을까?


오늘도 나는 동생을 붙잡고 하소연을 한다. 지긋지긋한 인생아



쌍둥이

같은 날 같은 병원 한두 시간 차이로 태어난 친구가 있다. 이름도 비슷하다 그래서 영이라고 칭해야겠다. 영이는 많이 엉뚱한 이상한 친구다. 남들과는 엉뚱한 사차원이다. 본인은 모른다 왜 자기가 엉뚱한지 그런데 주변사람도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명확하게 설명이 힘들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다.


영이는 중고등학교 시절 일명 일진이었다. 본인은 끝까지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일진이었다. 맨날 찢긴 교복 치마를 수선해서 치마가 터질 듯 짧은 미니 스커트였고 엄마 속을 너무 새겨서 결국 영이 엄마가 가위로 앞머리를 '숭덩, 쥐가 파먹은 듯 잘라서' 추성훈 딸 사랑이 처럼 짧은 앞머리를 가리기 위해 매일 깻잎 머리를 하듯 핀으로 고정했었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영이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나는 일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이랑은 초등학교 친한 친구였지 중학교 고등학교는 그냥 아는 친구였고 필요한 준비물이 있으면 서로 빌려주고 가끔 집에 놀러 가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는 평범한 동네 친구였다.


20살 알바를 하던 중 알바 펑크가 났는데 대타를 구한다고 해서 영이를 소개해 줬다. 영이는 흔쾌히 너무 좋다고 하고 싶다고 해서 펑크를 메꾸는 줄 알았는데 당일날 영이가 연락 두절이 되었다. 그렇게 난 그 알바 매니저한테 망신을 당했고 너무 화가 났다. 나에게 실망을 주었던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약속을 어기거나 빌려준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잠수를 타거나,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했다. 나한테만 했던 행동이었지 내 주변 사람에게 피해는 주지 않았으니 그냥 넘어갔는데 이건 참을 수 없었다.


"넌 책임감이 너무 없어, 나한테만 그러면 이해하는데, 내 주변 사람에게 마저 내 먹칠하는 네가 실망이야. 다시는 연락하지 마!"

"나 역시 마찬가지야. 연락하지 마"


미안하다고 말해도 모자란 상황에 지금, 당당한 영이 모습에 아주 그냥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영이랑 7년 가까이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천안 생활을 정리하고 인천에 올라온 후 내 생일날 문득 영이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때 영이가 "엄마!, 나 오늘 생일인데 생일상 없어? 엄마 너무해" 말한 그날 저녁에 상다리가 무너 질듯 가득 생일 상이 차려졌고 나는 덩달아 생일 상에 같이 초를 불렀다. 그때 생각하면 진짜 재미있었는데. 그렇게 영이한테 연락을 먼저 던졌다.


"영이야 잘 지내? 오늘 생일 축하해 영이야"

"하영이 너도 생일 축하해 잘 지내?"


정말 언제 미운 친구였는지 잊은 채 우리는 7년이라는 시간은 단 하루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일 얼굴 보고 매일 밥 먹고 매일 수다 떨고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매일 얼굴 보며 하루는 우리 집에 하루는 영이 집에서 엄마들의 밥을 먹으며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영이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뒤늦게 듣게 되었다.


영이네 엄마는 어려서 형편이 좋지 않아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10살에 공장 일을 했고 성인이 돼서 친정엄마의 강요에 못 이겨 나이 차이가 많은 반반한 평범한 집안에 시집을 가신 거였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 공장이나 식당에서 죽어라 일하며 내 자식만큼은 잘 가르치겠다는 생각이 영이에게 갔던 거였다. 내 기억에도 영이는 공부를 잘했다. 영이에게 영이 엄마는 공부만 시키는 집 밖을 못 나가게 하는 시험 점수에 예민한 무서운 엄마였다. 그렇게 영이는 스트레스로 하혈을 할 정도였고 하혈이 멈추지 않아 쓰러지는 게 다반사였고 그럼에도 엄마의 압박은 멈추지 않았고 영이는 중2 때 터졌다. 학원을 빠지고 친구들 이랑 노는 게 재미있어진 거다. 그렇게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다산 다난한 일들이 이었다.


나는 그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똑같은 학교 나온 친구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때 나랑 같이 놀자고 할걸 그때 그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전에 내가 영이랑 놀자고 할걸 그땐 왜 영이가 눈에 안 들어왔을까? 이제 라도 영이랑 같이 밥을 먹으며 걸어서 5분 거리에 친구가 있다는 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영이가 고맙다.


그렇게 밉고 싫고 죽이고 싶은 친구였지만 시간이 흘러 문자 하나에 사르륵 서로 이해하고 다시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친구가 몇이나 될까? 영이가 고마워 내 친구가 되어 줘서




미녀

내가 IT 회사에 처음 입사하고 입사한 지 1년 차가 되어 갈 때 정말 너무 이쁜 직원이 새로 들어왔다. 눈도 크고 날씬하고 정말 베이글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쁜 여직원이었다. 우연히 집 방향도 가까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집 방향도 가까운데 퇴근길에 커피 마시고 수다 떨다 가요!"


내가 회사 선배였는지 몰라도 거절하지 않는 미녀가 수긍했고 우린 검암역 공차에 앉았다. 왜 인천에서 살고 있는지 왜 부모님과 안 살고 독립했는지 현 회사 오기 전에 어떤 회사를 다녔는지 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4시간이 흘러 카페 폐장으로 내 쫓겼다. 둘 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집을 향했다. 다음날 우린 진짜 완전 10년 지기인 거 마냥 '전 남자 친구썰', '가정사', '방탄했던 과거 썰 ' 이야기를 하며 남들은 모르는 둘만의 수의 높은 대화를 하는 비밀 친구가 되었다.


둘만 친하고 그 누구도 끼지 못하니 막내 직원이 우리한테 다가와 친해지려고 말을 걸었다. 시끌 시끌 웃으며 대화하던 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히 대화를 멈추고 아무 말할 수 없었다. '분이기가 싸 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 대화는 은밀한 19금이 대부분 이었으니깐 절대로 말할 수 없었고 껴 줄 수 없었다. 그렇게 남들 시선과 남들의 이야기는 관심 없었다. 마이웨이처럼 둘만 꼭 붙어 다녔다.


매일 붙어 있던 우리는 모르는 게 없는 사이가 되었다. 미녀는 사연만큼이나 아픔도 상처도 많아 책으로 써도 300장짜리 소설책이 될 정도였다. 영화 속 이야기는 시시할 정도였고 사연 많은 유명한 '풍자'의 과거는 미녀 앞에서 먼지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 날 미녀가 나한테 슬그머니 도움을 청했다. 아니! 고민을 이야기해서 내가 나서서 도움을 줬다. 그건 일명 '대낮에 도주' 프로젝트였다. 남자 친구에게 벗어나기 위해 남자 친구 모르게 하루 만에 모든 짐을 옮기고 숨는 거였다. 그때 갈 곳이 없던 미녀는 급하게 친구 집에서 지내기로 했고 옷과 살림은 내 집에 보관하기로 했다. 반차를 내고 차에 가득 짐을 실어서 급하게 옮겼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 박장대소를 하면서 추억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난하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 우리의 일상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사건 사고는 해결되면 다음 사건으로 하나씩 수면 위로 올라왔다. 미녀도 나도 경찰서와 법원을 들락 거렸다. 그중에 한 번은 내가 누군가를 고소했었다. 보복이 두려웠던 나의 곁에는 언제나 미녀가 있어주었고 미녀 곁에는 내가 있어주었다. 서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비밀 친구에서 가족이 되었다.


서로의 남자친구보다 더 많이 연락하고 출근하는 아침마다 투덜 되며 하소연하는 사람이 가족과 남자 친구 이기전에 미녀와 나였다. 서로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해도 우린 더 친해졌다. 집에 놀러 가면 집에 갈 생각이 없이 자고 가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서로 사겠다고 하고 좋은 일 있으면 제일 먼저 연락하고 남자 친구가 스트레스 주면 죽일 듯이 동조하는 것도 서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집에 좋은 거 맛있는 거 있으면 문 앞에 걸어놓고 가고 불러서 먹이고 사회에서 만난 동생 이자 가족인 미녀는 이젠 없으면 우울증 걸릴 것 같은 일부가 되었다.


사회에서 만난 인연은 20년 이상된 친구 보다 더 엄마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어서 미녀가 고맙다.



똑순이

대학시절 전혀 다른 학과의 친구와 우연히 친해지게 되었다. 키도 작아 귀엽고 통통한 볼에 젖살이 빠지지 않아 정말 동안이었고 쌍꺼풀은 없는데 눈은 왜 이리 큰지 얼굴에 눈만 보였다. 정말 통통 튀는 말투와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매일 입고 다니는 진짜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운 타 학과 과대였다.

사실 똑순이랑 어쩌다 이렇게 친해지게 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말 휴지 끝에 물이 닿아 두리마리 휴지 전체가 젖어 부풀어 오르듯이 우린 그렇게 작은 인연이 번져서 우정이 부풀어 친구가 되었다.


똑순이는 괜히 똑순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내 친구들 내 지인들 통 틀어 제일 현실 판단을 잘하고 직언을 잘하고 자기 멋에 사는 똑똑한 지지배다. 종종 내가 "자만하지 마! 너무 너를 사랑해, 일도 잘하고 완벽해 남을 무시 하지 말고 겸손해져야 할 것 같아"라고 말할 정도로 쫌 완벽해서 탈이다. 게다가 제일 자랑스러운 건 혼자 힘으로 30살이 되기 전에 1억 이상을 모았고 재테크를 할 줄 알았고 돈을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본다는 것이다. 똑순이 정말 딱 맞는 별명이다.

처음은 내가 사회생활에 먼저 자리를 잡았던 터라 내가 밥 사주고 내가 챙겨 줬지만 이젠 내가 자리를 덜 잡았고 똑순이는 회사 팀장이 되어 강남에서 내 밥은 언제나 똑순이가 맛있고 비싼 걸로 사준다. 나 부럽지 않냐? 나 이런 친구 있다고 여기저기 소문내고 싶다.


"너도 할 수 있어"

"똑순아, 너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달라."


언제부터 인가 똑순이는 유리 발판으로 만들어진 세상 위층에 살았고 나는 아래층에 사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똑순이는 나를 단 한 번도 무시한 적이 없었고 내가 멍청한 질문을 해도 나를 멀리 하지 않았다.


똑순이가 22살 때 나한테 했던 말이 있다.

"하영이 너 지금 하는 지금 이 일이 너의 평생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변함없이 너의 자리가 그대로 있을 것 같아? 미래를 보고 직업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


똑순이가 24살 때 나한테 했던 말이 있다.

"하영아 너는 수많은 직업을 바꾸었고 그럼에도 나한테 했던 말이 뭔지 알아? "

"먼데?"

"이 일이 나랑 잘 맞는 것 같아! 천직이야 라고 말했어, 너는 무슨 일을 하든 다 잘했고 열심히 했고 즐겼어"


똑순이가 26살 때 나한테 했던 말이 있다.

"하영아 이젠 정말 직업을 바꾸지 말고 정말 정착이란 걸 해야 해 30살이 돼서 직장을 옮겨 다니면 안 돼 너를 위한 말이야. 이젠 한 가지를 꾸준하게 할 줄 알아야 해"


정말 똑순이 말이 맞았다. 나는 27살 때 공부를 해서 IT로 전향했고 똑순이 말대로 30살에 자리를 얼추 잡았다. 똑순이 조언을 흘려듣지 않았고 나름 고민을 할 때 똑순이의 말을 들었다. 정말 똑순이가 있어서 직업에 대한 생각과 미래에 대한 생각을 좀 더 심오하게 하게 만들었다. 똑순이 말대로 20대 초반부터 한 가지만 잘하고 열심히 하고 신중했다면 똑순이처럼 1억이라는 돈을 모으지 않았을까? 하지만 똑순이는 나한테 말했다.


"1억의 가치 보다 더 많은걸 경험했잖아. 남들은 자리 잡고 다른 걸 하려고 시도하다 실패하지만, 너는 그만큼 경험해 봤잖아, 너처럼 생각을 행동으로 바로 하는 부분은 부러워"


맞다. 나의 장점은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거다.


똑순이는 득과 실을 따지기 전에 관계를 더 많이 생각해 주는 정이 많은 친구라서 좋다. 아닌 건 아니라고 혼내주고 싫은 소리도 하고 좋은 것만 말하는 친구가 아닌 현실을 보고 아니라고 말하는 똑순이가 있어서 고맙다.

똑순아 내가 철부지 할망구가 돼도 네가 옆에서 잔소리해주는 할망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유

고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 이었던 희망이가 결혼한다고 한다. 삐쩍 말라서 스타킹이 남아서 다리를 헛돌았고 커피색 스타킹이 아닌 두꺼운 살색 스타킹을 신었었다. 똑 단발에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고 다녔고 내 기억엔 희망이가 마른 공부 잘하는 범생이로 기억한다. 강원대학교에 합격해 강원도로 거처를 옮겼다. 희망이는 강원도에서 짝을 만나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인천과 먼 강원도에서 지내지만 인천에 오면 꼭 얼굴을 보는 친구였다. 어느 날 인천에서 만났는데 살이 엄청 쪄서 너무 보기 좋다고 내가 반가워했다. 하지만 우울증 약물 치료 때문에 살이 20킬로 쪘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받은 가정폭력과 예민한 기질이 성인 돼서 분출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여러 번 했고 현재 예비 남편이 여러 번 응급실로 업고 달렸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두꺼운 스타킹을 신었던 이유도 여름에도 긴팔 체육복을 입었고 이유도 다 멍을 가리기 위한 거였다. 그 당시 그걸 몰라줘서 미안해서 추접스럽게 카페에서 소리 내며 펑펑 울었다.


나에겐 희망이는 그런 친구였다.


결혼 소식은 반갑고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뒤늦게 돈을 알고 자리를 잡자 바로 이착 같이 돈을 모으고 싶었다. 아니 모을 수밖에 없었다. 전세 보증금을 신용대출로 메꾸었기 때문에 보증금을 채우지 않으면 나는 신용 불량자가 된다. 230만 원 월급 중에 130만 원이 원금과 이자가 나갔다. 숨만 쉬어도 식대, 관리비, 보험료, 통신료, 교통비 기타 등등 80만 원이 나간다. 그렇다 나에게 남은 돈은 20만 원이다. 숨 막힌다. 후회하지 않는다. 인생 살면서 돈이라는 걸 모은 적이 없었는데 전세 살면서 2년 동안 3천만 원을 모았다. 억수로 스스로에게 칭찬한다. 하필 이렇게 돈이 없을 때 친구가 결혼한다.


솔직하게 말을 했다. 나는 희망이가 나를 이해할 줄 알았다.


강원도 교통비 식비 당일치기 지만 10만 원 잡아야 했고, 축의금을 많이는 못줘도 20만 원을 넣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럼 30만 원인데 당장 현금으로 모아둔 돈이 없었기에 30만 원은 불가능했다. 나에게 사치였다.

이런저런 돈이야기 살짝 하고 너의 결혼식이 멀어서 못 가겠다고 핑계를 말하며 카톡을 남겼다.


그 이후 나는 읽씹을 당하고 차단당했다.


콤비네이션 피자 보다 포테이토 피자에 올라간 머스터드가 좋아서 포테이토 피자만 먹던 희망이가, 떡볶이는 매워서 못 먹으면서 내가 먹자는 로제 떡볶이는 먹는 희망이가, 우리 집에서 배 안 고파요 말하면서 2 인분 삼겹살을 먹었던 희망이에게 나는 차단당했다.


돈이 없어서 갈 수 없었던 결혼식은 나에겐 같이 끌어안고 울고 웃고 하던 친구를 잃었다.

그 먹먹함은 한 동안 잊을 수 없었고, 돈이 없어서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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