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둠의 자식들>(1982)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어둠의 자식들>(1982)은 용산역의 뒷골목에 있는 윤락촌에서 몸을 팔아 생활을 이어가는 윤락녀들의 삶을 그린다. 그녀들의 삶은 그저 몸을 팔아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전부이며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갈구하지는 않는다. 그녀들의 종착점은 그저 수많은 남자들의 발길이 오고 간 붉은빛이 도는 다섯 평 남짓한 쪽방일 뿐이다. 순결을 상실한 그녀들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길은 윤락업 밖에 없으며 이러한 사회적 환경은 70년대에서 80년대 당시 윤락업에 종사한 여성들의 삶(Realism)을 시각적 에로티시즘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주인공 영애가 TV 속 가수를 바라보며 가수라는 직업 노동의 이상(理想)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TV 속 가수는 ‘나 행복할 수 있어요’라는 노래의 가사를 뽐낸다. 하지만 그 가수를 바라보는 영애의 현실에서는 ‘손님 받아라’라는 관리인의 목소리와 남자 손님의 목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어 과거에 가수였던 영애의 꿈을 강제로 깨워버린다.
가수라는 꿈은 영애가 가진 여성의 순수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가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시골 소녀 영애의 꿈을 무시하던 남 형제, 영애를 성적 도구로만 대하던 수많은 남성들은 그 당시 여성을 얼마나 미천한 존재로 대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사이 에로영화의 전신이자 전범이라 할 수 있는 호스티스 영화는 가진 것이라곤 몸밖에 없는 하층계급 여성을 그린다. 특히 농촌 출신의 여성이 상경해 온갖 직종의 노동을 전전하다가 당시의 모든 여성에게 강요된 순결을 상실한 후 겪게 되는 불운을 묘사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영애 또한 이러한 호스티스 영화 속 비운의 하층민 여성이며 성적 수단을 매개로 하는 에로티시즘의 객체로 묘사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영애의 삶에 유일한 다른 분류의 남성이 등장한다. 바로 영애와 결혼한 남편이다. 영애에게 남편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가수의 꿈을 함께 하고 딸아이에게 미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남편, 무엇보다도 영애를 진심으로 사랑한 유일한 남성이다. 하지만 영애는 남편을 잃게 된다. 그리고 딸아이 미현이마저 잃게 된다. 이러한 영애의 상황은 하층민 영애의 사회적 환경을 관통한다. 하층민에 속한 남편 또한 영애처럼 사회에서 힘을 쓸 수 없는 존재이다. 급성 폐렴에 걸린 아이는 치료비가 없어서 병을 고치지 못한다. 영애와 남편 그리고 딸아이 미현이가 속한 하층민 계급은 호스티스를 넘어 그 당시 계급 간의 격차를 뛰어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弱子)들을 대변하며 이들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호스티스의 삶과 비슷한 맥락을 보인다. 남편과 아이를 잃고 가진 것이라고는 육체 하나뿐인 영애가 상경해 갈 곳이라고는 윤락촌 밖에 없었다. 윤락촌에 자리 잡은 영애는 과거의 희망적인 삶을 잃은 채 다른 호스티스들과 함께 성 노동을 한다. 윤락촌에 드나드는 남성들은 호스티스들을 을(乙)로 대하며 자신들을 갑(甲)으로 둔갑한다. 호스티스들을 관리하는 관리인 남성들은 호스티스들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일삼으며 호스티스들이 상대하는 남성 손님들에게 ‘불쌍한 여자들, 돈밖에 모르는 야비한 년들’로 형용된다.
항상 밑바닥에서 기생하던 그녀들의 분노는 다름 아닌 교회로 표출된다. 호스티스 중 한 여성이 교회 전도사에게 ‘예수님은 우리 같은 불쌍한 여자들을 사랑하셨죠?’라고 말하며 구원을 바란다. 하지만 전도사는 피폐한 창녀들을 없애달라며 진정서를 내고 호스티스들은 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가와 호스티스들의 고성방가는 또 하나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내 몸 갖고 내가 장사하는데 니들이 왜 지랄이야’라는 호스티스의 대사는 그 당시 호스티스들의 비통함을 대변한다. 그녀들을 구원할 수 있는 요소는 예수라는 신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그녀들 스스로라는 자립성을 다시 한번 구축한다.
영애는 아이를 두 번 잃는 뼈아픈 비운을 맞이한다. 첫 번째 아이는 위에서 언급한 자신의 아이인 미현이, 두 번째 아이는 호스티스 중 한 명의 아이인 아영이다. 아영이를 낳은 호스티스 여성은 스스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이며 스스로가 어미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자해(自害)하는 여성이다. 영애는 아영이의 엄마가 죽고 난 후 아영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애지중지 키운다. 영애는 미현이가 자신의 궁핍하고 가난한 삶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타인의 아이이지만 미현이에게 용서를 구하듯 영애는 미현이의 환생과도 같은 아영이를 사랑으로 대한다.
하지만 영애는 아영이와 이별하게 된다. 정부에서 내려온 여성 관계자는 아동복리법을 내세우며 아영이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아영이를 데려간다. 관계자는 호스티스들에게 더러운 계집들이라고 비하하면서 갑(甲) 행세를 한다. 그리고 아영이는 크리스천(Christian) 가정에 입양이 된다. 그럼으로써 영애의 사랑은 타인에 의한 강요로 다시 한번 물거품이 된다. 물론 아영이는 영애가 키우던 윤락촌 쪽방에서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것이다. 법을 내세우는 것이 윤리적인 판단은 맞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내면의 이성을 따지자면 영애의 품이 더 나은 모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영애는 아영이에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본인이 이루지 못한 이상(理想)을 가리키며 아영이 곁을 떠나게 된다. 갈 곳 없는 영애가 돌아온 곳은 윤락촌. 영애는 또다시 호스티스의 삶을 살아간다.
70년대와 80년대 호스티스 영화들은 시골에서 꿈을 안고 올라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술집 여자로 전락하게 되는 여성들의 삶을 그린다. 대표적인 영화인 <애마부인>(1982)은 완전히 한국화 된 장르로 고착화하기 이전 단계의 초기 에로 영화로서 한국적 특수성(3s 정책과 순결 이데올로기)과 국제적 성인영화의 관행(레즈비언 판타지, 관음증적 장면, 소프트 포커스) 및 일본 성인영화의 영향(에로 그로 넌센스의 흔적으로서의 에로성, 변태성, 부인 시리즈 제목)을 골고루 포섭하고 있는 실험장의 역할을 수행한 영화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에 반면 <어둠의 자식들>은 윤락촌 여성들의 삶 자체를 다른 기교(과거와 현재를 드나드는 교차편집을 제외한) 없이 현실성 있게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호스티스 여성들이 처한 핍박한 상황에 집중한다. 영화에서 호스티스들의 모습은 한국 사회의 남성 우월주의라는 잘못된 사회 관습에 놓여있는 꼭두각시의 모습과 흡사하다. 언어적, 신체적 폭행, 성희롱, 강간 등을 일삼는 그녀들의 모습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여성의 도상(Icon)이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느낌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보기 힘든 여성의 도상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