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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우주

반쪽짜리 삶


그런데 웬걸, 유학을 나와보니 세상은 교과서와 축구공 너머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기후 변화, 인종 차별, 식량 안보, 교통 체증, 암세포 전이 등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더불어 자율 주행, 수직 농법, 비접촉 수술, 신재료 개발 등 인류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해결책들까지.


가슴을 뛰게 하는 그 한 문제를 해결해내기 위해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반짝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임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친구 한 명은 대중들이 아직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모른다며 기후 변화를 시각적으로 알리는 일이 급선무라 하며 나라 및 지역별 기후변화를 다양한 색깔로 표현한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인종 차별을 겪고 자란 나의 또 다른 친구는 인종 차별로 인한 학업 성취도 저하 문제에 꽂혀 학내에 “다양성, 평등성, 그리고 포괄성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이라는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는데 버스 노선이 이렇게 복잡할 필요가 있을까 늘 답답해하시는 어느 교수님은 우선 보스턴 시내의 교통 체증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다며 수학 알고리즘을 개발해 노선을 단순화하는 데 성공하셨고, 그 덕에 보스턴 시 초등학생들은 아침잠을 무려 30 분이나 더 잘 수 있게 되었다는 지역 신문을 보았다.


논밭이 고향인 친구는 현대식 건물의 무분별한 건축으로 농경지 면적이 점점 줄고 있다는 현실에 위기의식을 느껴 농작물을 수평한 지대 말고 지면에 수직 한 벽에 붙인 채 자라게 하는 수직 농법 (vertical farming) 에 관심을 갖고는 건물 벽 외관에 바를 수 있는 젤과 그 젤 안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들을 찾으러 다니고 있기도 했다.


어릴 적 친동생의 추락 사고로 수술 현장에서 갖은 마음고생을 하셨던 친한 형 한 분은 환자가 피를 흘리는 즉시 지혈할 수 있는 의료용 반창고는 왜 없는 것인가 한탄하며 젖은 표면에서도 단번에 작동 가능한 반창고를 개발해 보스턴 소재 병원에서 임상 테스팅을 해보고 계셨다.


수술 시 환자 몸에 흉터는 또 왜 이리 많이 생기는지 답답해하셨던 또 다른 형은 길고 가느다란 로봇을 만들어 환자의 몸에 최소한의 흉터 만을 남기고 정밀 수술이 가능한 로봇을 개발하고 계시기도 했다.


아이디어도 넘쳐나고 그 아이디어에 젊음을 바칠 청년들도 넘쳐나는 도시 보스턴. 큰 쇼크였다. 거리를 걸어도, 카페에 가도, 수십 통 씩 와있는 학교 이메일 함을 열어봐도, 길을 잃어 옆 건물에 잘못 들어서도, 벤치에 버려진 지역 신문을 들여다봐도, 온통 다 이러한 류의 이야기들이었다. 


충격이었다. 내가 맞이한 이 새로운 우주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책상 공부는 학생의 마땅한 본분이기도 하고 그 유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삶이었다. 교과서에 담긴 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생각, 그리고 남의 지식이었다.


목소리, 그래 목소리. 내 가슴의 목소리! 바로 그것으로 사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 아닐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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