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살아왔다. 경제학 뿐인가, 욕망, 돈, 투자, 세금과 같은 실물경제에 대해 논하기보다 (내가 보기에) 선악과 (나의 입장에서) 유불리에 대해 성토하는 게 더 편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현실경제를 옳다 그르다의 잣대로 판단하려 할 뿐이구나. 결국 그 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같이 읽었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경제학에 대해 알고 싶은데 췹고 재미있게 잘 써진 책 추천해달라고 하면 언제나 빠지지 않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토드 부크홀츠는, 세계 유수의 투자 회사들에서 투자 자문 역할을 맡고 있는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에 대통령 경제담당 비서관을 지냈기도 했고, 세계적인 헤지 펀드 기업인 타이거의 펀드 매니저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위치성이 너무나 명확히 보인다. 특히 마르크스와 케인즈에 대해 평가한 부분을 보면 그가 어떤 경제 사상의 바탕 위에서 이야기를 하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런 부분들이 좀 짜증나고 편파적이라고 느끼긴 했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그가 소개해주는 설명을 따라가면서 그의 논리에 대해 한번 더 비판하는 식으로 읽는 것도 재미있었다.
"세계는 젖과 꿀이 넘쳐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없고, 그렇기에 경제학을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경제학은 선택의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경제학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가르쳐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이해시켜줄 뿐이지요."
저자는 학자로서, 현실 경제 참여자로서 300년 경제학 흐름에 대해 분석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책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의 인구론, 데이비드 리카도의 상대우위, 존 스튜어트 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앨프리드 마셜의 수요공급 곡선, 베블런과 갤브레이스의 제도학파, 케인스의 뉴딜 정책, 밀턴 프리드먼의 화폐, 제임스 뷰캐넌의 공공선택학파, 로버트 루커스의 합리적 기대이론, 대니얼 카너먼의 행동경제학까지 경제학의 역사를 만들어온 걸출한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과정에서 경제학은 두 가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발전을 거듭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 번째는 시대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중상주의 시절, 부가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금의 수량같은 것에 좌우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나왔다. 리카도는 자유무역이 한참 활성화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나왔고, 멜서스의 인구론은 유토피아적 낙관론에 반박하기 위해 처음으로 쓰여졌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피폐하고 곤궁한 삶과 노동이 소외되는 현장에서 어떻게 이것을 타계할 수 있느냐 라는 시대적 질문에서 나왔고, 케인즈는 대공황이라는 사회적 상황에서 어떻게 경제학적으로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냐는 시대적 질문에서 나왔다. 이렇게 보았을 때 어떤 이론을 피상적으로 이론 그자체로만 받아들였을 때 이해하는 이론과 그 맥락과 배경을 알고 난 후의 이론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경제학은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앞선 학자들의 이론을 부정하거나 계승하거나 발전하기 위한 과정을 반복해왔다. . 애덤 스미스의 이론 중 어떤 부분이 리카도에 의해 반박되거나 계승되었고, 또한 어떤 부분이 케인스에 의해 부정되었고 케인스의 이론은 다시 통화이론, 공공선택이론, 합리적 기대이론 등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즉 어떤 학문이든 어떤 천재 한 명이 짜잔 하고 나타나는 경우는 없고, 우리는 모두 거인의 어깨 위에 서야만 좀 더 멀리 더 깊이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건 철학도 마찬가지다. 니체의 방법론을 계승해 발전시킨 푸코에 의해 니체는 그 가치를 더 인정받았고, 프로이트는 라캉에 의해 더 풍부하게 해석되었다. 지젝의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 맑스에 대해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만든 거인들의 어깨위에 올라서서 그들이 본 세상을 살짝, 아주 살짝 맛보기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하겠다.
거인의 어깨에서 경제학이라는 프레임을 눈에 담아내면서 나는 다음 두가지를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첫째, 경제학은 절대 정치학과 따로 떼어내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경제학이라고 하면 진공의 상태에서 그래프로서만 만나는 어떤 상태라고 생각했었다. 생산과 분배라고 할 때, 생산은 경제학은 영역이지만 분배는 정치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무 자르듯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원래 ‘정치경제학’으로 시작된 학문이 ‘정치’를 뗀 ‘경제학’만으로 불리게 되면서(1900년대 초, 케임브리지 대학에 알프레드 마셜에 의해 경제학 과목 개설), 주로 수식과 그래프의 비중이 커지면서 ‘사람’이 빠지고 납작해진 거다. 장하성의 <경제학 강의>에서 ‘어떤 학문들이 그렇듯이, 경제학도 “정치경제학”이라는 원래의 명칭으로 불러야 그 학문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낸다’는 내용이 기억나기도 하고.
둘째, 이 책을 보면서 경제학의 방법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흔히 방법론이라고 하면 인식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는데, 인식론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방법론은 그것을 학문화시키는 방법과 의미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네이버 과학사 사전 참고) 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이론화할 수 있느냐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처음 애덤 스미스나 맬러스가 인간 행동에 대한 통찰로 이른바 썰을 푸는 것이었다면 데이비드 리카도에 이르러 연역적 사고방식에 따른 시나리오를 그림으로서 경제학적인 방법론의 기틀을 만들어간다. 이어서 마셜의 수요공급 곡선이 수요와 공급, 가치와 효용으로 그것들을 좀더 정밀하게 만들어간다. 이후 마르크스와 케인즈, 밀턴 프리드먼 등등을 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얼마나 다채롭게 설명할 수 있고, 의미화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결국은 방법론은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 라는 학문을 만드는 주체의 위치를 생각하게끔 한다. 애덤 스미스의 입장은 그 시절 막 신흥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부르주아 계급, 리카도는 당시 한참 많은 돈을 벌어들이던 자유무역주의자,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베블런은 엔지니어, 케인즈는 정부, 밀턴 프리드먼은 통화주의자, 그리고 마지막에 잠깐 언급되는 슘페터는 자본가까지. 이론은 이론을 만드는 사람이 어떤 위치에서 사회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필히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입장들은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욕망들을 옳다 그른다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 자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자체가 그 도그마같은 욕망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그 욕망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운용할 것인가는 당연히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욕망 그자체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욕망을 긍정하기,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다는 게 어찌보면 더욱 놀라운 사실일지도 모른다.
자유시장주의의 아버지이자 경제학의 시작인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자연적인 충동, 혹은 성향이 그의 분석의 토대가 되었다며 그 성향을 두가지로 말한다. 첫째, 모든 인간은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어한다. 둘째,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의 것과 교환하고 교역하고 거래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성향이다. (P.65)
그렇다. 모든 인간은 더 나아지고 싶고, 그러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거래하고 교류하고 싶어 한다. 나 자신이 가진 더 나은 삶을 향한 욕구를 긍정하게 된다는 것에서 경제학이 시작된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레디컬한 시작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