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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Sep 19. 2021

네 인생의 이야기 - 테드 창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러하기 위하여

테드 창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단편 SF 작가다. 그는 여덟 편의 중단편만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선 그 작품들을 묶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한 권의 단편집이 출판되었는데, 모두 각각 리뷰할 가치가 있는 걸작들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이야기다, 아름답고, 가장, 슬픈, 그 중에서도. 


외계인과의 조우를 그린 과학소설은 많다. 하지만 외계인의 언어와 그것이 토대한 인식론적 양태에 대한 사고실험을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전개한 작가가 있었던가? 언어학과 물리학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은 차치하더라도 치밀한 논리전개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그의 솜씨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언어 진화에서 습득의 용이함은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해. 헵타포드의 경우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적, 인지적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서로 아예 다른 언어를 쓰는 편이 오히려 같은 언어를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내는 것보다 더 논리적인지도 모르는 일이지." 

게리는 내가 한 말에 관해 생각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아마 그들은 우리의 문자체계는 과잉 투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제2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있는데도 허비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야."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글을 쓸 때 그들이 왜 제2의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 

"흐음, 실은 그 '최소'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어.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는 불완전하거든. 어떤 상황에서 광선은 그 어떤 가능성들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택하니까 말야. 따라서 빛은 언제나 극치(極値)의 경로, 바꿔 말하자면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든지 아니면 최대화하는 경로를 택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해. 최소와 최대는 수학적인 속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으니까, 이 두 상황 모두 하나의 방정식을 써서 나타낼 수 있지.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지면 페르마의 원리는 최단 원칙이라기 보다는 '변분(變分; variation)' 원리 중 하나에 해당해." 



이 소설의 플롯은 다소 독특하다. 처음에는 두 개의 시점에서 혹은 두 개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언젠가부터 그것들은 둘이 아닌 것이 된다. 소설 상에서 그 정확한 지점을 짚어내는 것은 힘들다. 혹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소설 자체를 화자의 회상으로 간주하고 그가 가끔 언술의 맥락을 바꾼다고 가정한다면 그가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서 볼 때 애초에 서술의 관점은 분열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맥락상 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이러한 독특한 구성방식은 이야기의 주제에 기여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혹은 이야기의 초기설정 상 필연적으로 예견된 논리적 귀결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 경우에는 어느 쪽의 해석이든 동등한 정도로 타당하다. 화자의 어조나 서술방식이 작중 사건의 결과로서 또는 주제 구현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예는 많다. 매우 훌륭한 예를 꼽을 수도 있다. 다니엘 키즈의 <찰리>가 그렇고,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만큼 독자에게 형언할 수 없는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드물다. 


형언할 수 없는,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하다. 우리는 화자의 이야기를 추체험하면서 동시에 화자의 언술행위를 추체험한다. 이 둘은 논리적으로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즉 우리가 둘 중 하나만을 추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곧 우리가 화자에 보다 더 감정이입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경험한 일은 지구상의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그것들을 이중적 의미에서 대리 체험하게 되고 그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의 마지막 대사 


"응." 


이 지닌 무게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해할 수 있다. 1/2컵의 사랑에 기쁨 한 스푼과 슬픔 두 스푼, 그리고 무한히 무거운 1/2컵의 공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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