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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Aug 27. 2021

최저임금과 알타미라 벽화

'들소'를 기억하라

이문열에 푹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생 때 읽은 그의 단편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들소”였다.


천재적 재능을 지녔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나는 바람에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혈거인의 이야기다. 무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석기 시대. 사냥꾼으로선 여자보다 나을 게 없는 주인공은 사냥감을 분배받을 때도 제일 맛없고 질긴 부위를 받고, 예쁜 여자도 품지 못한다. 맛있는 고기와 미녀는 당연히 모두 전사들의 몫이다.


예술적 재능과 창의성을 압살당한 채 전사들 무기 세공이나 하면서 연명해오던 그가 결국 이 벽화를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부는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여기 소개한 건 소설의 극히 일부분이니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어릴 때 이 소설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아 정말 그러네 내가 만약 원시시대에 태어났으면 스무 살까지도 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설령 운 좋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사회 최하층민으로 비참하게 살았겠네, 였다.


이 애널로지를 아주 조금만 더 확장해보면 우리 사회 하층민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들은 그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운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그들을 비하하거나 무시하고 또 그들의 가난을 그들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며 매도한다면, 그건 상상력의 빈곤과 영혼의 부박함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내년 최저임금은 9,160원이다. 이게 많다고 자영업자 다 죽는다고 우는 소리들을 한다. 물론 힘들겠지. 예를 들어 편의점들도 힘들다.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어려움을 해외 진출로 타파하고자 노력하고 있단다.


http://m.thebell.co.kr/m/newsview.asp?svccode=00&newskey=202108241219261760106768

이마트24도 지난 6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첫 매장을 꾸리며 해외 시장 진출의 포문을 열었다. 5년 안에 300개 해외 매장을 개점하는 게 목표다.



간혹 최저임금 자체를 없애고 자유 시장 메커니즘에 맡겨야 한다는 극단적인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난 우리 사회의 일원에게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해주는 게 다른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 최저임금 9,160원이라고 해봐야 월 200만원도 안 돼. 솔직히 수도권에선 월 200만원으로 살아가기도 매우 어렵다.

전세가입니다. 한 명 누워버리면 끝



이러면 또 노력 안 한 놈들을 왜 챙겨야 하냐는 얼치기 우파들이 있겠지. 잘 생각해봐.


0. 현재의 퍼포먼스 평가 함수는 시대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1. 부모, 환경, 운, 재능 등 타고난 조건이 너무 열악하여 개인의 노력이 무의미한 경우도 있다.

2. 앞으로 노력을 하려 해도 일단 지금 "살 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어쩌면 2번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어쨌든 살게는 해줘야 할 거 아니냐? 백수로 업글하기 직전의 내 최근 연봉은 사회생활 처음 시작할 때 받은 연봉의 12배 정도 된다. 물론 내 자랑이지만, 운도 좋았지. 운이든 실력이든 사회적 렙업을 요구하려면 일단 0렙한테도 기본 방어구나 무기, 회복약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야 뭐라도 해볼 생각이라도 들지. 지 자식한테는 절대 안 해줄 수준으로 대우해주며 직원 굴리겠다는 건 그냥 노예를 갖고 싶다는 심보 아니냐.


21세기 민주시민이라면 좀 인간답게 살아라. 생존주의 이데올로기(?) 뒤에 숨어서 자본의 노예로 살지 말고. 생존을 위해 자본을 모으는 건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가치의 우선순위와 공동체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된다면, 그런 자는 그저 양복 입은 짐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늘 하는 얘기지만,


짐승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어라
- 마루야마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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