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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Oct 11. 2021

86 -에이티식스- (애니 파트1)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같은 별을 보고 있다

제국의 인공지능 전투 로봇 '레기온'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공화국의 무인기 '저거노트'. 공화국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다며 연일 선전중이다. 그런데 사실 이 무인기는 무인기가 아니다. '에이티식스'라 불리는 비국민, 아니 아예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유색인종 청소년들을 총알받이로 희생시키고 있었던 것. 물론 법적으로는 전사한 '사람'이 없다.


곤충형 기계 병기 저거노트에 탑승하여 끝없는 전투를 치르는 어린 '프로세서'들. 텔레파시형 통신기를 통해 그들과 감각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며 전술 관제를 하는 '핸들러'. 핸들러들은 눈과 머리카락 색깔이 은색이어서 '인간'으로 인정받는 인종인 '알바'들 중에서도 엘리트인 고위 장교들이다. 주인공 레나는 악명 높은 부대 '스피어헤드'의 신임 핸들러로 배속되고, 에이티식스 또한 인간이라는 그녀의 신념으로 인해 피할 도리가 없는 희망과 절망에 직면하게 되는데...


암울하고 잔혹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액션과 감정 묘사가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 초반부에는 비인간인 스피어헤드 부대원들과 귀족 핸들러 레나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이들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전쟁물이라기보다는 휴먼 드라마.


대사나 장면의 연출이 탁월하다. 스포일러를 피해 한두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레나 소령이 신임 장교들을 상대로 위험한 특강을 하는 장면. 연설 내내 거의 레나의 뒷모습이나 학생들만을 보여준다. 관객을 신임 장교들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꾀한 듯하다.







청중의 당혹과 불편은 곧 관객의 몫이 된다.


이 장면에서 가장 고독한 자는 바로 레나 자신이다. 소외된 레나의 이상이다.



 초반부 관객들은 아무래도 주인공인 레나 소령에게 감정이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레나의  연설 장면에서 연출된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감독은 '너희들 또한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 그저 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 뿐이다'라는 진실을 폭로한다. 이는 실제 세계에서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3세계 국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내는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동시에 텍스트 내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연설은 레나가  자신을 향해 쏟아내 열변이요, 다짐이다. 사실 여기선 레나만이 유일한 청중이라고  수도 있다.




연설의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관객인 우리와 레나 사이의 거리를 확 좁힘으로써 이러한 각성 효과가 극대화된다. 즉 이 장면에 이르러 관객은 레나의 내적 결의에 깊이 동조하게 된다.


아무래도 감독님이 좀 배우신 분인지 이런 식의 의도된 장면 연출이 심심찮게 눈에 밟힌다. 예를 들어 레나와 칼슈타르 중장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논쟁 장면을 보자.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구성이다. 레나와 칼슈타르 사이의 간극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하기 위해 둘을 멀찍이 떨어뜨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 사이에 큰 기둥을 두 개나 두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빛과 어둠까지. 교과서적인 연출이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외재화한 공간적 배치 뿐만 아니라, 특정 대사나 아이템을 매개로 한 장면 전환이라든지,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는 롱테이크 샷이나 무음 연출, 과하지 않으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시적인 영상 등, 감탄을 자아내는 장면들이 한둘이 아니다.


시원시원한 액션물을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경쾌하면서도 진지한 터치로 섬세하게 쌓아올려가는 휴먼 드라마를 원한다면 충분히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이런 스타일의 전쟁물은 상당히 드물다. 원작 한 권 분량을 11화로 구성했다는 파트1만으로도 높은 극적 완결성을 보여준다. 소장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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