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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Sep 19. 2021

시계태엽 오렌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려면?

앤서니 버지스의 장편. 볼 만했지만 명성에 비해선 대단찮았다. 역시 큐브릭의 영화 덕에 유명세를 탄 건가? 하지만 악당 주인공 녀석의 걸쭉한 입담과 잔인한 악행에 매료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주인공 알렉스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그리고 무엇보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들으며 순수한 파괴충동을 느끼는 멋진 녀석이 아닌가!


강요된 선함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악함이 더 나은가? 당연하지. 우리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자유, 자유, 더 많은 자유를.


하지만 정확히 어디까지를 강요된 것으로 볼 것인가? 우리는 학교, 부모, 교회, 미디어, 정부 등에 의해 세뇌되어 사회적 규범을 따르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루도비코 요법은 좀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본질적으론 다른 사회화 수단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니, 중요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엔 정신신체적 변화가 인격 전체와 완전히 통합되지 못했다. 때문에 주인공 알렉스는 스스로의 변화를 자각할 수 있었고, 마음으로나마 "강요된 선"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그는 완전히 세뇌되지 못했다.


반면 완전한 세뇌는 그것이 급격하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다른 종류의 인격적 변화와 전혀 차이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자아가 변화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혹은 "강요되었음"을 지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강요된 것이 아니다. 강요란 자아의 의지에 반한 강제적 변화 요구를 의미하니까. 하지만 자아가 강요를 자각한다면 덜 세뇌된 것이고, 충분히 변화(강요)되었다고 할 수 없다. 자유의지를 박탈한다는 의미에선 완전한 세뇌가 루도비코 요법보다 더 가혹한 것이란 얘기다.


즉 가장 가혹한 자유의지의 박탈은 더 이상 자유의지의 박탈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 경우에는 그 어떤 윤리적 갈등도 고뇌도 발생하지 않는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내세의 구원이 있다고 믿는 광신적인 기독교도가 그 전형적인 예다. 그 혹은 그녀는 행복하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그 혹은 그녀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강요'된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윤리적 규범들에 대한 반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과연 인간을 죽이는 것이 나쁜가?" "국가의 법규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가?" "참된 선이란 무엇인가?" 등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사고체계를 전복시키고, 자아가 하나의 편집증적 구조로 통합되지 못하도록 인격을 끊임없이 분열시켜야 한다. 왜냐? 윤리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는 세뇌된 상태와 본질적으로 구분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흔듦으로써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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