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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Sep 19. 2021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훌륭한 반전의 세 가지 조건

우타노 쇼고의 장편 미스테리. 별 기대 없이 봤는데 이거 상당한 수작이다. 사건들이 아주 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흡인력이 상당하다. 그뿐이랴. 위트 넘치는 화법, 잘 꼬아놓은 플롯, 매력적인 주인공, 거기다 최상급의 반전까지! 사서 읽어도 돈이 아깝지 않은 추리소설이다. 


미스테리 소설은, 단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령 장편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반전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독자에게 사건의 진상을 노출시키지 않는 미스테리의 결말이 너무 뻔하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훌륭한 반전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훌륭한 반전을 위한 조건들엔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다음의 세 가지가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1. 의외성

2. 개연성

3. 필연성 


첫째, 의외성. 의외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얘기될 수 있다. 하나는 텍스트 내적 의외성이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 외적 의외성이다. 전자는 독자(관객, 청자 모두를 포함 이하 독자로 통일한다)가 반전을 알아차리기가 힘들도록 사건들을 배열하고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다른 말로 하면 반전의 참신성이다. 즉 독자가 반전을 알아차리고 난 후에도 "어떻게 이런 걸 생각했을까"라며 감탄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대표적인 쓰레기 반전 영화 <쏘우>의 반전은 텍스트 내적 의외성은 지니고 있으나 텍스트 외적 의외성은 지니고 있지 못하다.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뭐 특별할 것 없는 반전이라는 얘기다. 반면 그렉 이건의 소설 <쿼런틴>의 반전은 텍스트 내적 의외성과 외적 의외성을 모두 획득하고 있다. 소설을 읽다가 독자는 머리를 탁 치게 된다. 내적 의외성이다. 또한 그렉 이건 이전에 그런 생각을 한 인간이 아무도 없었다. 외적 의외성이다. 


아주 드물지만, 텍스트 외적 의외성은 지니고 있으나 텍스트 내적 의외성은 지니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테드 창의 소설들 중 이런 반전을 보여주는 것이 꽤 많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논리적인 사고실험을 하다보면 도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귀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서술 양식 자체도 매우 차분하고 솔직하며 점증적이라는 점에서 내적 의외성은 결여하고 있다.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사건의 진상을 서서히 파악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은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그 참신성에 감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텍스트 외적 의외성이 텍스트 내적 의외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따로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텍스트 외적 의외성을 지닌 반전의 외연은 점점 줄어들게 마련이다. 아이디어의 참신성은 노출 빈도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참신한 반전은 나타난다. 과거의 텍스트를 뒤틀거나 가감하거나 재표지화함으로써. 사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어디 있겠냐마는 걸작은 언제나 새로운 걸작으로 회귀하는 법이다. 


둘째, 개연성은 말 그대로 반전이 그럴싸하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요소다. 역시 텍스트 외적 개연성과 텍스트 내적 개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의외성과는 반대로, 훌륭한 반전이 되기 위해서는 텍스트 외적 개연성보다는 텍스트 내적 개연성을 획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텍스트 외적 개연성이란 현실에 비추어 그 반전이 그럴 법한가를 따지는 개념이다. 반면, 텍스트 내적 개연성은 텍스트의 내적 논리에 따라 그 반전이 그럴 법한가 아닌가를 따지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친부를 살해한다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어처구니 없게도 진짜 생부를 살해하게 되는데 이런 플롯은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우리 상식으로는 너무 우연적이라는 얘기다. 즉 텍스트 외적 개연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오이디푸스왕의 세계에서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왜? 신탁은 실현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대어 숙명(신탁)을 피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오이디푸스의 친부살해는 소포클레스의 신화적 세계 내에서는 필연적인 사건이다. 요컨대 <오이디푸스왕>은 내적 개연성을 획득한 훌륭한 반전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필연성. 이것은 텍스트를 구성함에 있어 그러한 반전이 꼭 들어가야만 하는 필연성을 말한다. 즉 이것은 텍스트 내의 시점에서 보면 초월론적 필연성이다. 왜 저자는 그런 반전을 써야만 했는가? (사실 이렇게 말하면 초월적 필연성이 되어 다소 어폐가 있다.) 다시 말해 반전이 주제의 형상화에 기여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의 내용과 주제는 텍스트가 창조된 직후부터 저자의 손을 벗어난다. 그런 이유에서 초월적이 아니라 초월론적 필연성이라고 얘기하는 게 더 맞다.) 


소위 반전을 위한 반전 영화들은 이런 필연성을 결여한 경우가 많다. <쏘우> 역시 그렇다. 도대체 그놈이 범인이건 아니건 그게 영화의 주제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애초에 주제랄 게 없는 영화긴 하지만.) 반면 영화 <식스 센스>의 반전은 필연성을 획득하고 있다. <식스 센스>의 반전은 타자성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소통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타자와 소통하게 되는 순간,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원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인 순간 바로 자기 자신이 이미 타자였다는 사실을 즉 원 바깥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않았는가. 즉 우리가 통약불가능성의 근거로 상정하는 타자의 타자성은 결국 우리 자신의 억압된 부분에 대한 외면,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사실 필연성이야말로 훌륭한 반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이나 <소피의 세계>, <마농의 샘>, <도그빌>, <오이디푸스왕>, <평화의 신(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에 삽입된 액자만화)> 등이 필연성을 획득한 훌륭한 반전 텍스트의 예다. 


아주 장황하게 돌아왔는데, 그래서 결국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아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는 정말 훌륭한 반전 미스테리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벚꽃...'은 외적 의외성과 내적 의외성을 모두 획득하고 있다. 더불어 텍스트 내외적 개연성을 모두 획득하고 있다.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진한 감동을 주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반전 미스테리물로 말이다. 반전 자체가 주제에 기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즉, "벚꽃..."은 반전의 필연성 또한 획득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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