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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Apr 19. 2024

조카의 전화

“고모, 릿따 고모가 좀 있으면 가게에서 산다는 거, 정말 이우까?”

조카가 불퉁스럽게 소리를 내질렀다. 오랜만인 조카의 전화에 반가움을 표시했던 나는 당황했다. 


“어~ 큰고모네 집에서 지낸 다음엔 광양 가서 살거여.”

“누구 마음대로 마씨? 아니 날 더러 돌보랜 햄쑤과?”


어? 갑자기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고 얼얼했다. 지난번 가족들이 모였을 때, 4개월 후 둘째(릿따) 언니의 거처는 마땅한 시설이 나올 때까지 가게에서 지내는 것으로 대충 정리되었었다.


친정집은 이층집이다. 아래층은 방이 넷 칸이고 위층은 세 칸이다. 지은 지 45년이 되는 친정집은 아버지가 일본에서 불법 노동자로 일해서 얻어낸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런데 그 집이 온전히 남아있게 된 것은 둘째(릿따) 언니 덕이다. 언니가 그곳에서 슈퍼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언니 덕에 우리는 편안히 생활할 수 있었고 쪼들리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오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둘째(릿따) 언니 덕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둘째 언니와 어머니는 가게 옆에 달린 방에 같이 살았다. 그동안 남동생이 결혼했고 친정집 나머지 부분은 남동생의 살림집이 되었다. 남동생 내외는 두 딸을 낳았고 맞벌이하는 부부를 대신해 아이들은 언니와 엄마가 돌보았다. 큰 조카에게 젖병을 물리고 빙긋이 웃던 언니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두 아이는 가게에서 잘 자랐고 청소년기를 거치고 어른으로 성장했다. 남동생네와 언니가 함께 붙어있어도 살림을 달리했으니 같이 오래 살 수 있던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둘째 언니는 남동생을 때로는 자식처럼 때로는 남편처럼 의지하며 가겟방에서 살았다. 조카들과도 잘 지냈다.


지난 1월 남동생 사망 후, 나는 둘째 언니를 돌보기 위해 친정집에 남았었다. 남동생 장례 후 일주일이 되었을까? 가겟방 밖으로 어둠이 내렸고 언니와 나는 저녁을 먹은 참이었다. 조카가 퇴근하면서 도넛을 들고 가게 문으로 들어왔다. 둘째 언니가 좋아한다는 팥이 듬뿍 들어있는 도넛이었다. 가겟방에 앉아 함께 먹으며 얘기를 주고받다가 둘째 언니의 거취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나는 언니가 성당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요양원 얘기를 꺼냈다.


“릿따 고모가 갑자기 낯선 환경으로 옮기면 힘들어지지 않을 건가 예? 일단 가겟방에서 머무르는 게 좋을 것 같수다. 퇴근할 때 밤에 가게에 들러 제가 좀 봐드리면 되고 마씨.” 


 따스한 눈길로 조카가 바라보며 말을 맺는 동안, 둘째 언니는 무심하게 도넛에 집중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아빠의 죽음에 따른 충격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고모에게 저렇게 마음 쓸 수 있다니...... 나는 감격스러웠고 큰 조카가 너무나 고마웠다. 


제주에 있는 동안 나는 둘째 언니를 위해 장기요양등급과 기초 생활수급 신청을 마쳤다. 전기장판에 발목 화상을 입어도 남이 와서 상처를 냈다고 믿을 만큼 언니의 인지 능력은 엉망이되어 버렸기에, 다행히 장기요양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언니를 혼자 두기에는 왠지 불안했다. 동생의 사망에 따른 심리적 불안이 심할 것 같아서다. 일단 네 자매끼리 돌아가며 한 달씩 언니를 돌보기로 했다. 


둘째 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기 며칠 전, 나는 조카들을 위로할 겸 같이 밥 먹자고 했다. 언니와 함께 큰 조카의 차를 타고 레스토랑을 찾아가던 날은 눈이 깔려 길이 미끄러웠다. 내가 언니를 모시려 했을 때, 조카는 조심스럽게 언니의 팔을 붙잡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의자를 빼고 언니를 앉히고 지팡이를 한쪽에 잘 세워놓았다. 언니가 좋아하는 해물 파스타를 시키고 연신 피자를 잘라주면서 언니가 먹기 좋도록 마련했다. 


“릿따 고모, 기억 나멘? 우리 함께 대만 가서 피쉬 스파에 발 담갔을 때, 고모가 놀라서 얼른 발을 빼었잖아.”


나는 조카가 보여주는 사진을 보며 남동생의 가족과 함께 한 가족처럼 즐거웠던 언니의 시간을 엿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었다.     



나는 핸드폰에다 대고 이렇게 조카에게 말했다. 네가 돌보라는 것 아니다. 퇴근해와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좋다. 언니는 주간보호센터에 혼자 다니면 된다. 성당 요양원이 꽉 차서 그러는 것이니 당분간이다. 그 집은 할아버지가 애써서 완성된 것이다. 언니는 가게를 하면서 부모님을 모셨고 그 집을 유지했다. 방 한칸에서 살 자격이 있다......


조카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동안 고모를 자기네가 모셨다며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했다. 언니는 눈뜨면 가게를 보며 가겟방에서 혼자 밥해 먹고 살았는데, 어쩌다 반찬을 가져다준 것도 모시는 거던가? 갑자기 왜 저러는 것일까? 가게에 누가 들어오겠다고 얘기라도 했던 것일까? 집을 고친다고 하더니 무슨 욕심이 생긴 것일까? 


서울로 옮겨온 지 3개월이 흐르는 동안 조카의 마음은 돌같이 변해 있었다.


“요양원에 갈 때까지 돌아가며 고모네가 모십써!”

단칼에 무 자르듯 내지르는 조카의 말에 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찬 바람이 불고 있을 주인 없는 가겟방이 눈앞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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