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사 발령일은 1986년 9월 1일이다. 처음으로 받은 임용장에는 < 9호봉을 급함. 홍천 00학교 근무를 명함. 강원도 교육청 교육감 > 식의 낯선 용어가 쓰여 있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밀려 있어서 당일 아침에서야 나는 서둘러 셋째 언니와 함께 홍천으로 내려갔다. 발령 전까지 나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대학원보다 교사생활을 하라는 어머니의 호소에 따라 할 수 없이 정리하다 보니 늦어졌다. 그렇게 등 떠밀리듯 내려가려고 하니,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더군다나 나는 부모님이나 언니와 더불어 산 적은 있어도 혼자서 생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발령을 받게 되면 나는 혼자서 생활해야 했다. 그것도 강원도에서! ‘강원도 첩첩 산골’이라는 말을 접한 것이 전부인 내게 ‘홍천’이라는 곳은 어딘가 모르게 외지고 낯설고 두렵게 다가왔다.
가방 하나만 들고 언니와 함께 홍천 버스 정류장에 내려섰다. 그곳에서 학교는 그리 멀지 않았다. 우선 무엇보다 방을 구하고 갑작스럽게 이사를 해야 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을 설명하고 결근을 허락받았다. 시골이라 의뢰할 부동산이 귀했고 내가 들여다볼 집도 많지 않았다. 골목 골목을 돌아 주인집 옆에 딸린 작은 집을 보게 되었다. 방 하나에 허름하게 딸린 작은 부엌 하나. 그래도 독립적인 공간이라 결정하려는 찰나, 부동산 업자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여기 주인은 00학교 선생이라, 단단하고 안심이 될 겁니다.”
00학교는 내가 다닐 학교 아닌가? 매일 아침에 같이 등교하라고? 그건 안되지.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집을 포기했다. 또 다른 집은 학교에서 멀었다. 걸어 다니기가 만만찮을 터였다. 세 번째 집은 주인집에 방 한 칸을 얻어쓰는 경우였다.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방 한 칸이지만, 학교가 가까웠기에 할 수 없이 세 번째 집을 골라 방에다 가방을 들여놨다.
방을 얻고 나자 언니와 시장에 가서 필요한 이부자리와 살림 도구 등을 장만했다. 그때 샀던 물건 중에 지금은 쓰이지 않는 ‘곤로’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석유를 태워서 밥을 짓는 도구인데, 한번 밥을 지을 때마다 까만 그을음이 온통 피어나서 매번 닦느라고 애를 먹었었다. 마치 귀중한 도자기 다루듯 닦았었는데, 어느 해인가 자취에서 하숙으로 옮기면서 자취하는 제자에게 물려주었던 보물(?)이다.
일찍 차를 타고 온 데다 돌아다니며 방을 구하고 살림 도구까지 마련하느라 온몸이 지쳤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었다. 뽀글 파마였다. ‘너무 어리게 보이면 아이들이 얏 잡아 본다.’는 언니의 충고에 따라 동네 미용실로 향했다. 처음 해보는 파마였는데 얼굴이 두툼하고 둥글게 튀어나와서 시장에서 물건 파는 아줌마처럼 보였다. 누구도 나를 어리게 보지 않을 것 같았다.
오후 4시, 언니는 집으로 가야 했다. 나는 언니를 보내기가 싫었다. 외따로 떨어진 낯선 곳에 나 혼자 버려지는 것 같아 삶이 두려웠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멀어져가는 언니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언니~ 나도 데리고 가!’를 연신 외쳐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공중전화를 찾아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사라 언니가 와서 무사히 이사했수다......”
“게매이, 가 보지도 못 허여신디...... 애썸시라이~”
무사히 잘 끝났다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나 돌아갈래~’라고 아우성치고 싶었다. 어찌어찌 전화를 끊고 자취 집으로 돌아왔다. 구석진 골목길을 스적스적 걸어 방 한 칸에 들어앉으니, 갑갑하고도 외로웠다. 세평 남짓한 방에 얇은 이불 한 채, 앉은뱅이 밥상 하나, 수저와 그릇 몇 개, 옷 가방, 비키니 옷장 하나, 빗자루와 쓰레받이 같은 잡동사니들. 그래도 언니가 있어서 제법 갖춘 물건들이었다. 마주 보이는 창문에는 커튼이 없어 더욱 썰렁하고 횡뎅그레했다. 하릴없이 이부자리를 끌어다 펴고 드러누우니 누런 천정에 새겨진 격자무늬만 고속도로처럼 왔다 갔다 했다.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지?’
삶이 아득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