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결혼이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작가 Feb 11. 2021

배우자의 초능력


내가 잘 알고 있었던 배우자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익숙한 그 모습도 다시 보니 새로워 보이고, 천천히 들여다 보니 배우자를 선택한 내 결정이 맞다는 확신을 주는. 그 계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이미 가깝다고 생각한 거리에서 한발짝만 더 다가가면 놀라운 관계의 변화가 생긴다. 왜 우리가 서로의 배우자인지 깨달음을 주었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탄탄해졌다. 무엇보다 더 멋진 배우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솟구쳤다. 마치 경쟁하듯이.




한 회사에서 사내 부부라는 점은 공감대가 많아 득이기도 했고, 적당한 거리두기가 힘들어 독이기도 했다. 사랑의 유효기간과 쾌락적응기간 2년이라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때마침 그 시기에 콩깍지가 막 벗겨지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한창 다음해 사업계획자료를 만드는 시기였다. 남편은 내가 만든 보고자료에 대해 가감없이 피드백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업무와 내 업무는 엄연히 다르고 불쾌한 참견으로 밖에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사내부부라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일을 하는 지 정도만 파악하고, 회사에서는 동료로서 각자의 업무만 최선을 다하는 거라 생각했다. 서로의 일에 대해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것도 포함하여. 엄연히 따지면 그날 남편이 먼저 선을 넘은거다. 내용보단 표나 서식 같은 형식에 치중하여 사무실 고래고래 소리을 질렀다. 나도 감정적인 꼰대가 되고 싶었다. ‘감히 3년차가 6년차한테......!’  남편의 이유는 무안을 주려던게 아니라 내 자료의 템플릿과 구성만 달라져도 더 가독성 높은 자료가 될 수 있어서 아쉬움에 하는 조언이었다고 했다. 어쨋든 그날 사무실은 시끄러웠다. 한 사무실에서 부부가 같이 일하는 것도 구경거리인데, 동료를 가장한 남편이 큰소리로 피드백을 하고 있으니. 뒤에서는 과장님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서로의 발전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부부라며 반농담 식으로 놀려대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집에서 잠시 냉랭하긴 했지만, 남편은 곧바로 내 자료를 직접 자기의 입맛대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핵심 추진사항과 목표는 진하게 강조
세부 운영내용은 정확하게
기대효과는 설득력있게
적절한 어휘 사용으로 짧고, 명확하게


벌써 6년전의 일인데도 생생하다. 내 자료를 수정하면서 계속 중얼거렸던 말들이. 듣자하니 내가 만든게 얼마나 한없이 못나고 별로길래, 자존심이 상했다. 그것도 잠시 손을 댈수록 그럴싸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보고 자료가 눈에 띄게 이뻐졌다. 그리고 나는 남편의 아바타가 되어 새벽 2시까진 자료를 수정하고, 다음날 제출했다. 과장님의 의견은 생각보다 손댈게 없다고 하셨고, 그날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남편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이왕 선을 넘은 거, 보고자료 작성이 내 맘 같지 않을땐 새벽까지 남편을 부려 먹었다. 남편역시 내 부탁이 싫지 않은 듯 아내 외조에 적극 동참해줬다. 따지고 보면 뛰어난 재능을 아내에게 기부한거다. 사내 부부의 단점은 장점보다 컸다. 회사도 힘든데, 한 회사라는 것도 아주 불편했다. 결국 각자 이직을 하자 맘을 먹고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교육경력 6년차로 강의나 교육진행 경험이 많았다. 회사 내에서는 친절한 교육담당자 이지만 퇴근 후엔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강의 한 날엔 더더욱. 딱히 회사 밖에선 내 업을 드러낼 일이 없었다. 한창 각자 이직을 위해 서류 접수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남편이 먼저 서류 합격이란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적성 합격이란 소식이 들려왔고 본격적으로 이직의 문에 성큼 다가갔다. 면접은 총 2차로 진행되었다. 1차 면접은 실제 부서의 운영진들로 구성되어 실무능력을 파악하기 위한 자리였다. 남편은 경력직으로 이직이 처음이다 보니 대학교를 갓 졸업한 취준생처럼 정직하고 열심히 요령없이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력직을 뽑는 회사는 요령없는 정직한 사원이 필요한게 아니다. 당장 실무에 투입될 요령있고 노련미도 있는 직원이 시급할뿐. 느릿느릿한 성실함도 중요하지만 빠릿빠릿한 눈치가 더 플러스가 될 수 있고, 굳이 구구절절 풀지 않아도 당당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자신감을 증명 해야 한다. 지나치게 성실한 일꾼의 이미지인 남편을 능수능란한 전문적인 경력직으로 변신시켜야 했다.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이 업무는 많이 해봤으니 누구보다 정확하고 빠르게 할 줄 압니다, 게다가 저는 성실합니다’ 이것을 면접 시간 동안 풀어 내야 한다. 남편보다 이직 선배이자, 강의 좀 해본 나는 자연스럽고 여유있게 말하는 면접 방법을 코칭했다.


자기소개가 길면 지루해
첫인상이 지루하면 무슨말이든 집중이 안돼
jop description에 적힌 내용은 당연하고
업무랑 관련해 추가로 할수 있는 걸 강조해
지금 준비한 내용 절반이상이 군말이야,
방금 한 말은 필요없는 말이야. 삭제해.


비록 면접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상대에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달하는 방법 만큼은 자신있었다. 꼭 도움이 되고 싶었다. 꽤 엄격하고 까칠한 선배모드로 하나하나 지적했고, 남편은 흔쾌히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면접 당일 나도 연차를 쓰고 남편을 따라 면접장소 근처 카페에서 대기했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간절히 바랬다. 꼭 합격하게 해달란 바램은 아니었다. ‘떨어지더라도 상처받지 않게 해주세요.’ 면접이 끝난 후, 밝은 표정으로 카페에 나를 데리러 왔다. 저녁을 해결하자며 초밥집에서 배불리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흰봉투를 슬며시 내밀며, 고생했다며 용돈이라며 내밀었다. 남편이 받은 면접비였다.이건 면접본다고 고생한 당신이 쓰라며 소란스럽게 번갈아가며 사양했다. 이틀 후, 남편은 2차 면접을 보러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임원면접은 내가 뭘 도와줘야 할지 막막했지만, 1차가 실무면접으로 업무위주의 자신감이었다면 2차는 임원면접이니 태도,인성 위주의 질문이지 않겠냐며 그 부분은 여보가 우주에서 1등이니, 자신감만 충전하라고 응원을 보냈다. 사실 해줄 말이 마땅치 않았다. 내가 해 줄수 있는건 응원뿐, 임원분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건 복불복이 아닐까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결과는 합격! 나는 그날 남편의 면접비로 동료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저녁 한끼를 먹을수 있었다.


부부사이에도 일은 일, 가정은 가정이라고 선을 긋는게 감정소모에 있어서 훨씬 편할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배우자를 위해 말했는데, 상대는 간섭이나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 부부는 이미 네선, 내선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넘긴지 오래다.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끄덕여주며 적극적으로 응원했었고, 아니라고 판단될 땐 매몰차게 이야기하는 사이이다. 선을 자주 넘다보면 부작용도 있다. 아예 무관심이 나을 거 같다는 고비만 잘 넘기면, 오지랖이 나에 대한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배우자의 모습이 뜻밖의 초능력으로 재발견 된다. 나는 내 남편에게 언제 발견될지 모를 나의 또 다른 초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열심히 잘 살아야겠단 생각을 한다. 처음보단 다정한 대화는 줄고, 냉정한 대화가 오고가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좋다.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아서인지 마음이 쉽게 흔들이리지 않는다. 여보의 초능력 아주 칭찬해.


매거진의 이전글 절약수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