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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결혼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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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Jan 25. 2021

명절이 다가온다.

명절이라는 불편함을 즐기는 날이
제게도 올까요?




6시30분이 되면 휴대폰 알람 대신 암탉이 갈라진 생 목으로 울어대고, 가마솥은 혼자 일하는 게 억울한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락모락 열을 뿜어낸다. 우리 어머님의 도마 위 칼질 소리도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듯 그리 경쾌하게 들리진 않는다. 이게 바로 영혼 가출한 며느리의 리얼 명절 일상.

시댁은 어쩜 가마솥의 연기도 도마와 칼질 소리까지도 부담스러운지.


공식 남의 집 식구 출신인 나와 형님은 푹 자진 못한 채 언제나 일등, 이등을 다투며 화장실에서 여유 있게 씻고 나오는 편이다. 반면 남편과 아주버님은 이 집출신이라 그런지 마음을 푹 놓고 자나보다. 제사가 8시에 시작되는 줄 알면서도 꼭 7시 55분쯤 아버님의 고함소리에 맞춰 겨우 눈을 뜬다.

‘아.. 잠자리가 그리 포근하셨어요?’


이제 진짜 회초리 들 때가 된거 같은데. 나라면 이미 회초리를 꺾으러 산으로 항했을 것이다. 으.. 시댁 갈때마다 어금니를 얼마나 깨물었던지.


이제 좀 적응할 때가 되었나 싶어도 결국 낯선 이 곳.
아마 시댁의 문턱들도 객식구인 내가 드나드는 게 낯설겠지. 낯설어한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인데, 나는 늘 갈 때마다 간장이 어디 있는지 물어본다.

‘어머니, 간장이 어디 있었죠?’

이것은 데자뷰다. 8년째 같은 같은 현실. 7년 동안 1년에 두번, 세 번, 네 번 온 적도 있는데.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나? 나는 까마귀 고기를 먹은 적이 없는데. 왜 처음듣는 말 같지?

이게 바로 의식적 낯설음이다.

기억하기 싫었나 보다. 아니, 솔직히 싫었다. 우리 친정집 간장도 어딨는지 모르는데 내가 여기서  하고 있지? 마음에 불만이 가득하니, 어른들이 하는 말씀들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굳이 불합리한 시댁공기에 집중하고 싶지 았다. 그 와중에 눈치는 있어 뭐라도 하고 있다는  보여주기 위해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중에 단순 반복 업무를 찾자. 그래서 안착하게 된 나의 시댁 업무는 꼬치 끼우기.

‘꼬치를 끼우다 보면 잡념이 없어져..’
‘하다 보면 색깔도 크기도 일정하고 이쁘게 만들고 싶어 지거든’
그래서 온갖 꼬치를 다 끼우기 시작했다.
산적, 햄, 대파, 버섯, 맛살..
“어머니, 산적 말고 더 할 거 없어요?”

노동을 더 하는 게 아니다. 시댁에서 부당한 일을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주기 위한 한낱 몸부림. 겨우 진정시킨 마음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 집 출신의 두 웬수들 때문에. 남의 집 딸 둘이서 하는 일은 눈으로 보기만 하면서, 밥 먹는 것도 눈으로만 보지. 밥 먹을 땐 귀신 같이 나온다.


우리 시댁도 여느 시댁들처럼 한숨 돌리면 밥상 차리고, 한숨 돌리면 고기를 굽고 있었다. 아무리 명절이 가족과 함께 보내는 날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이 집 식구들 배부르려고 남의 집 딸들의 희생이 반 강요되는 날이었다.


우리 집에서 이야기하면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이 이 곳 유교맨들 사이에는 없었다. 잔다르크처럼 혁명을 외치고 싶었지만 철딱서니처럼 비춰질까 입은 꾹 다물고 쥐 죽은 듯이 있다가 다음날 친정 가는 시간만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래도 하루, 길면 하루반나절이라 괜찮았다. 명절이 더 길었다면 나는 이미 혁명을 최소 세번은 시도 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의지가 되었던 건, 갈때마다 낯설음과 어색함을 나눠 가져주는 내 동지 형님이다. 나보다 무려 4년이나 일찍 이집으로 시집와 훨씬 많은 명절을 보냈을 우리 형님. 남편 욕하는 게 내 발등 찍는 일이라는 것도 알지만, 이날만큼은 내 발등에 상처가 생기든 말든 형님과 도란도란 사이좋게 내 남편 흉 한번, 아주버님 흉 한 번씩 주거니 받거니 하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게 명절의 맛이지. 사이다를 마시는 것보다 더 뻥뚫리는 기분이었다.


이 동지애는 왠만한 전쟁터에서 싹튼 의리, 우정과는 또 다르다. 더 깊고, 진하다. 우리는 이 집안의 부조리와 불공정을 알면서 묵인하는 고지식한 유교맨들과는 달랐다. 우리가 입만 뻥끗하면 집안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는 히든카드를 쥐고 있었지만 나대지 않았을 뿐이다. 그 어떤 혈육관계보다 남편보다 더 끈끈한 사이다. 고작 일년에 열번도 안 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형님은 나와 동갑이지만 맏며느리었고,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명절 빼고도 제사만 세 번인데 군말 없이 제사도 척척 지냈고, 명절엔 나물을 맡아서 한다. 아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명절 음식의 최고 난이도는 나물 무침. 사실 우리 형님이 나물을 무치는 건 본 적 없지만, 어쨌든 나물을 삶는 건 봤다. 나물 담당, 그것만으로 어머님께 인정받는 며느리 인증 끝.


동갑에 철없고, 할 말 다 하는 동서지만 내가 안쓰러운지 뭘 해도 나를 먼저 위해주고 늘 괜찮다고 먼저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다 남 같아도 이 집에 와서 가장 내 편인 사람, 형님 아니었음 어쩔 뻔했을까. 내가 아는 어른 중 손에 꼽는 가장 멋진 어른, 우리 아주버님은 매일 매일 절을 해도 부족하다. 8년 전에나 지금이나 유일한 내 산소호흡기이자 박 씨 며느리의 고달픔을 가장 잘 아는 내 시댁 동지. 명절에 남편은 없는게 낫지만 형님은 없어선 안된다. 형님 없는 명절은 상상하기도 싫다.


어쨌든 기다리지 않았던 명절이 또 다가온다. 가도 가도 낯선 시월드 세상, 이번엔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래도 내편 형님이 있어 덜 외롭고 감사하다. 형님이라도 계시니 다행히 목적이 있는 명절이다.

클렌징 오일과 마스크팩은 빼먹더라도 이것만큼은 꼭 챙겨야 한다. 물론 명절 주간에 남편의 태도에 따라 먼저 챙기고 싶기도 하고 일부러 두고 가고 싶기도 한데, 일단 가져는 가보자. 보통은 명절 전날, 아버님 댁 마당에 주차를 하고 크게 심호흡 한 후에 착용한다.


착한 며느리 가면, 오랜만이야
쓸때마다 넌 나랑 참 안맞구나


가면의 유효기간은 4일이다. 일년에 두번만 이틀씩 착용할 수 있다. 이틀 후, 친정 가는 길에 가면을 시원하게 벗어 던지는 상상을 한다. 단, 너무 멀리 던지면 다음 명절에 찾기 힘드니 그래도 눈에 띄는 곳에 보관해 둬야겠다.




에필로그


여보! 언젠가는 여보집 갈때 가면이 필요없는 날도 오겠지? 다음 생애는 꼭 며느리로 태어나 남의집에서 명절 길게 보내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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