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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Sep 04. 2023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닌데(9)

암스테르담 - 성에 찰 때까지 걸었다.

마지막 여행지에서의 온전한 첫 날은 날씨가 맑았다. 햇볕이 따갑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니까, 날씨 하나만큼은 끝내줬다고 해도 되겠다. 끝내주는 날씨로 아침을 시작하는 암스테르담이 괜히 마음에 들었다. 토스트와 소시지 같이 별 것 없는 숙소 조식을 먹고 빨리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이번 암스테르담 여행은 주변 1~2시간 거리의 소도시까지 돌아보는 여유로운 여행이었는데, 이 날의 계획은 잔담과 잔세스칸스, 그리고 볼렌담까지 돌아보는 것이었다. 첫 유럽 여행 때 근교를 돌아보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제대로 느꼈기 때문에 이번 근교 일정들도 조금 더 신이 났다. 잔담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 30분 정도 걸렸다. 가는 길에 핸드폰을 유리창에 딱 붙여서 창밖의 풍경을 영상에 담았다. 언제든 머리가 복잡할 때 이 길거리 풍경들을 돌아보고 싶을 것 같았다. 

잔담에는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하차한 곳은 굉장히 뚱딴지 같은 곳이어서 여긴 어딘가 싶었는데,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따라 걸어가다보니 레고마을이라는 별명다운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색 파란색 흰색으로 칠해진 장난감 같은 건물, 애니메이션스러운 서사가 하나 붙어있을 것만 같았다. 귀여운 건물은 사진만 하나 찍어두고, 건물 앞에 깔려있는 운하길을 따라 걸었다. 운하변을 따라서 2,3층짜리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있었다. 1층은 모두 가게들이었는데, 뭔가 특색 있는 물건들을 파는 곳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생필품을 파는 곳들이 더 많았다. 한 10분 정도는 가게 구경을 하다가 금방 싫증이 나버려서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했다. 이번 네덜란드 여행의 테마가 그랬지만, 특히 잔담은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게 제일 좋았다. 가장 일상적인 풍경이 평화롭기가 쉽지 않은데, 잔담은 특히 그런 동네였다. 길거리에 열린 작은 시장, 굽어지는 길에 혼자 지나가는 자전거, 건물 벽에 있는 낙서, 배가 지나갈 때 다리가 올라가는 모습까지 하나하나 다 머리를 비우고 쳐다보고 싶은 장면들이었다. 가져간 필름이 적지 않았는데, 아무 생각없이 찍고 싶은 사진들을 찍다가 필름 두 통을 다 써버리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갈 곳이 많은데 어느덧 필름이 1통 남아버렸다는 걸 깨닫고, 밥을 먹기로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먹을만한 곳이 있나 둘러봤는데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입맛이 없었던지라 쓸데없이 돈을 쓰고 싶지도 않았고 무겁게 먹고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식당과 메뉴를 한참 재다가 결국 버스 내린 곳까지 와서야 브런치 가게를 발견했다. 피자인지 뭔지 모를 고기빵과 주스를 시켰는데, 식당을 찾는데도 많은 시간을 썼고 음식도 생각보다 늦게 나와서인지 음식이 나올 때쯤 입맛이 또 돌았다. 그렇게 시장한 상태에서 먹은 빵은 진짜 맛없었다. 먹는 내내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거지' 하는 생각 뿐이었다. 

생각보다 잔담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서둘러 잔서스칸스로 가기로 했다. 잔서스칸스는 도심을 벗어나면 있는 호수를 낀 풍차마을인데, 물과 풍차와 풀 때문에 디톡스를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잔서스칸스의 풍경을 보는 내내 잔담에서 낭비한 필름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잔서스칸스에는 물과 풀이 많은만큼 가축들이 많았다. 풍차를 뒤로 하고 풀을 뜯어먹는 소들이 평화롭기 그지없어서 신중하게 찍기로한 필름의 몇장을 할애했다. 잔서스칸스 산책로엔 나 말고도 같이 호숫가를 따라 걷는 관광객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가족, 부부단위 관광객이라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괜히 부러웠다. 혼자 여행하는 게 즐겁지만 이렇게 잔잔한 순간을 나눌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는 건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산책로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네덜란드 국기도 보고, 정어리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도 보고 보더콜리와 산책하는 주민들도 만났다. 특히 사랑스러웠던 순간은, 복실이라는 이름이 딱일 것 같은 강아지가 물가에서 신나게 헤엄치는 순간이었다. 헤엄을 치다가 주인에게 돌아왔다가, 물 한 번 탈탈 털고서 다시 헤엄치러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주인 커플은 헤엄치는 강아지를 즐거워하도록 놔두고 있었는데, 그 장면에 있는 모든 존재가 다 행복해하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양해를 구하고 강아지의 사진을 영상에도 필름에도 담았다. 잔서스칸스를 다 돌아보고 다시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해리가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내가 보는 풍경을 해리도 같이 볼 수 있게 내 얼굴이 아니라 풍경을 비춰줬다. 언젠간 같이 암스테르담에서 산책하자고 이야기를 하면서, 해리랑 미주알 고주알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생각보다 긴 시간을 잔담과 잔서스칸스에서 써버린 탓에 볼렌담을 가기로 했던 계획을 틀어서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가기로 했다. 볼렌담은 다른 날 시간을 내서 가기로 하고, 암스테르담의 시내를 돌아보고 싶었다. 숙소에 들러 새 필름을 몇 통 챙기고, 암스테르담의 시내를 산책하러 나섰다. 내가 느낀 암스테르담의 가장 큰 매력은 운하였다. 좁은 운하와 넓은 운하가 도시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오래된 돌길과 낮은 돌건물, 지나다니는 배와 곳곳에 심긴 나무들이 시선을 계속 빼앗았다. 벤치에 앉아서 멍을 때리다가 배가 지나갈 때 좀 예쁜 구도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다시 산책하면서 성당에 들어가 미사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냥 암스테르담의 가장 평범한 순간들을 계속 만끽했다. 해리가 추천해준 암스테르담 노래들을 브금 삼아 머릿속에 영상으로 남겼다. 

걷다보니 서서히 배가 고파졌다. 해리가 추천해준 감자튀김 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한 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앉아서 먹을 곳도 없는 길거리 감자튀김집에 사람들이 짧게나마 줄서서 주문을 하고 있었다. 감자튀김이 맛있어봤자 얼마나 맛있다고, 해리가 꼭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던 양파+커리+마요 조합으로 감자튀김을 시켰다. 감자는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맥도날드 감자튀김이 아니라 좀 두꺼운 감자튀김이 깔때기 모양의 종이 받침대에 가득 담겨있었고 소스가 그 위에 뿌려져 있었다. 조금만 흔들려도 소스가 내 손에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걸 어떻게 먹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가장 위에 있는 조각부터 입에 넣었다. 와, 와, 와, 와, 와. 진짜 너무 너무 너무 맛있었다. '그냥 감자튀김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라고 생각한 나 자신의 무지와 오만에 화딱지가 날 지경이었다. 앉을 곳도 없이 파는 길거리 감자튀김집 옆에 서서 그 자리에서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먹으면서도 '아 이번 여행에서 못해도 3번은 더 오겠다' 고 생각했다.(실제로 3번 더 갔다) 바로 한 접시를 더 시키고 싶었지만 다른 먹을 것들도 먹어야해서, 어렵게 발길을 옮겼다. 감자튀김집 바로 옆이 쇼핑거리였는데, 각종 브랜드들의 매장이 즐비했다. 스트룹 와플 매장이 보이길래 바로 들어가서 하나를 시켰다. 내가 먹어본 스트룹와플은 작은 CD 크기에 와플 사이에 잼이 들어가있는 것이었는데, 길거리에서 즉석으로 파는 스트룹와플은 일반 CD 보다도 더 큰 사이즈의 단면에 초콜릿이니 잼이니 하는 것들을 발라주는 형태였다. 초콜릿이 맛있다해서 시켜먹어봤지만, 이미 감자튀김에 콩깍지가 씌인 상태에서는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진 못했다. 


늦은 오후에 감자튀김에 와플까지 먹은 터라 배가 부를 법도 했는데, 며칠째 먹고 싶었던 김밥을 파는 한식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며칠 내내 달고 짠 것만 먹어서인지 김밥이 며칠째 땡기던 차였다. 암스테르담에 한식당은 많았지만, 김밥을 파는 곳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 버스로 15분을 가야하는 곳이었는데, 별로 주저하지 않고 버스를 탔다. 볼렌담도 안가기로 했으니, 시간이 남아돌아 가능한 일정이었다. 맛집이었던 것인지 가게에는 외국인들이 줄을 서있었다. 주문을 받는 직원분은 한국인 분이었는데, 내가 주문할 차례가 되니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주문을 받아주셨다. 간만에 먹은 김밥은 몇 조각 되지도 않았는데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먹었던 설탕과 기름들이 한식으로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부를대로 부른 배를 꺼뜨리려고 아까 갔었던 쇼핑 거리로 다시 향했다. 해가 저물 즈음이라 날은 시원했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밖에 많이 나와있었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과 벤치에 앉아 운하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를 하염없이 걸어다녔다. 아무 생각 없이 암스테르담 노래를 들으면서 풍경을 눈에 꾹꾹 눌러 담고 싶었다. 중간에 레고 매장에 들러 해리가 사고싶어했던 '별이 빛나는 밤' 제품을 구경하는 것, 그리고 유명은 하지만 좀전의 감자튀김집보다는 맛없었던 감자튀김집에서 같은 메뉴를 사먹은 것 빼고는, 해가 질 때까지 걸어다녔다. 암스테르담의 온전한 첫날의 일정은 걷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잔담에서도 잔서스칸스에서도, 암스테르담 시내에서도 평화로운 광경을 성에 찰 때까지 눈에 담으려고 계속 걸었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나서야 다리가 아픈 줄 알았고, 그제서야 숙소에 돌아갔다. 하이네켄 한 병을 사마시고서야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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