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가 풀리는 6일차, 호텔 체크아웃은 11시였고 내가 예약한 검사 시간은 8시였다. 어차피 파리로 넘어가려면 일찍 움직이는 게 좋겠다 싶어서 가장 첫번째 타임에 잡았다. 짐 들고 검사소까지 왔다갔다하기도 싫어서, 씻지도 않은 채로 검사소로 갔다. 가는 길에 파리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파리에서 묵을 호텔도 알아보던 와중에 검사소에 도착했다. 검사소에 도착하니 안면을 튼 그때 그 직원분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래도 상태가 멀쩡해보인다며 인사를 건네주었지만 검사할 때에는 또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기대를 확 꺾어주었다. 차라리 고마웠다. 검사 결과는 또 30분이 걸리니, 나는 알버트하인에서 샌드위치나 하나 사서 돌아가기로 했다.
알버트하인에서 샌드위치와 주스를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메일이 날아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라는 혼잣말을 속으로 하면서 메일을 열어봤다.
Result : Negative
어..어..? 어?! 어?!!!!! 음성 결과지였다. 음성.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과지였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결과지였다. 5일 전에는 받지 못해서 한국으로 못가게 만든 그 결과지였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잠시 앉아야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비행기 표를 바로 찾아봤다. 약 4시간쯤 뒤에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가는 비행편이 있었다. 가격을 보지도 않고 바로 결제를 했다. 파리로 가는 버스 티켓을 취소했다. 파리 숙소를 알아보려고 켜둔 부킹닷컴 앱을 꺼버렸다. 바로 부모님과 해리에게 희소식을 전했다. 반쯤 혼이 나간 채로 숙소로 돌아가서 리셉션에 프린트를 요청했다. 인쇄를 도와준 직원이 인쇄물을 보더니 축하한다고 해줬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방에 올라가 짐을 쌌다. 사온 샌드위치와 주스는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파리 갈 준비를 미리 해둔 덕분에 별로 챙길게 없던 짐들을 금방 챙기고 체크아웃을 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국에 돌아가는 게 이렇게 기쁠 수 없었다. 한국말이, 독산동이, 서울 지하철이 너무너무 그리웠다. 5일 전 비행편 취소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정신없이 향했던 공항으로 다시 가고 있었다. 패닉이었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흥분되는 마음이었다.
스키폴 공항은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코로나로 가장 혼잡해진 공항 중 손에 꼽히는 스키폴 공항은 출국수속을 밟는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법도 했지만, 나는 지루하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조급할 따름이었다. 빨리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그런 상태에 가까웠다. 출국수속까지 마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는 비행기에서도 즐겁게 시간을 보냈었는데 돌아가는 비행기는 그냥 빨리 지나갔으면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의 시간은 대부분 잠을 잤다. 그렇게 해야 체감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 같았다. 경유 공항인 이스탄불 공항에서는, 점심을 현지 메뉴로 간단하게 먹고서 금방 한국행 비행기로 갈아타야했다. 이스탄불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에는 한국인이 많았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한국인들이었는데, 막상 비행기에서 만나니 늘 그래왔듯이 익숙했다. 그리고 그 익숙한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 진짜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났다. 집에 돌아가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라는 마음이 모락모락 피었다. 그렇게 9시간 뒤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렇게 내 여행이 끝이 났다.
[프롤로그]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니다. 그만 두었는데 시간이 좀 나서, 이때가 아니면 언제 가겠냐는 마음으로 무작정 떠났다. 여행을 계획한 건 1주밖에 안됐다. 출국하기 1주 전에 비행기표를 샀고, 하루 전에 마지막 출근을 했다. 무엇을 챙겼는지 안챙겼는지 제대로 확인도 못하고 짐을 싸고 출발했다. 그렇게 이번 여행은 얼렁뚱땅 시작됐다.
기대했던 것만큼 사람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21살 때의 유럽 여행이 워낙 호기롭고 당찼던 여행인지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29살 때의 유럽 여행은 그보다는 조심스러웠고 그보다는 쉬웠다. 그러다보니 에피소드가 많은 여행은 아니었다. 물론 마지막엔 전혀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를 만들었지만 말이다. 혼자 하는 여행의 느낌이 달랐다. 어릴 때는 새로운 기회와 세상을 만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면 이번 여행은 휴식과 함께 '적당한 텐션'의 여행을 하고 싶었다. 막상 하고보니 '적당한 텐션'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편하려면 아예 편하던지, 흥미로우려면 아예 흥미롭던지였다. 8년 전에 흥미로워봤으니, 이번엔 편한 여행을 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니 정말 즐거웠다. 막상 여행을 하는 순간에는 지겹다고 지루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기를 쭉 쓰면서 돌이켜보니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가벼울 수 없었다. 마음이 가볍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어도 영국에서 오래 지낸 여행자들과 돈 주고도 못할 기억들을 만들기도 했고, 다시 보고 싶은 뮤지컬도 생겼다. 한 여행에 3번 이상 먹고싶은 음식도 만났고, 의도치 않았지만 네덜란드의 평화로움을 계획보다도 더 오래 만끽했다. 그 결과로 여행에 대한 죗값(할부)을 연말까지 치러야했지만, 결국 어찌어찌 갚았고 기억은 남았다. 돌이켜보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무언가를 쓰고 싶어진다. 이번 여행기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번엔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닌데, 앞으로도 그만두면 여행을 가야겠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여행을 가려고 그만두는 날도 왔으면 좋겠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