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의 인연의 시작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왜 내가 꼭 독일로 왔는가에 대하여. 더군다나 대학교에서 불어불문을 전공하였으며 그 이전에도 독일과의 인연은 1도 없었기에 다들 의아해한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사실 꼭 독일이 아니어도 됐다"이다.
나의 독일과의 인연은 대학교 선배가 나에게 독일에 있는 한국 대기업에서 인턴을 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면서 시작되었다. 휴학 후 봉사활동 및 배낭여행 그리고 교환학생 경험은 있었지만 인턴 경험은 없어서 한창 취직에 도움이 될 스펙이 필요하던 때였다. 프랑스 인턴 자리였다면 더 기뻐했을 테지만 프랑스에 있는 기업에서의 인턴 모집 공고는 찾기가 힘들었다. 독일은 프랑스의 바로 옆 국가이니 일단 독일에 가서 혹시 프랑스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지켜보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았고, 또 지금까지 관심 국가가 아니었던 새로운 곳에서 잠시 생활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인턴직은 독일어를 할 줄 몰라도 영어만 가능하다면 지원할 수 있다고 하여 나는 선배가 알려준 이메일 주소로 이력서를 보냈다. 이력서를 보낼 때만 해도 해외 인턴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내가 설마 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바로 며칠 뒤 외국 번호로 전화가 왔다.
어느 어느 회사의 어떤 차장이라고 했다. 난 학교 도서관에 앉아있었는데 너무 벙쪄서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 안을 뱅뱅 맴돌며 묻는 말에 대답을 했다. 전문 지식에 대해서 묻는 질문은 없었고 대부분의 질문의 요지는 외국 생활을 잘 견뎌낼 수 있는지,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였다. 전화 인터뷰 끝에 그 차장님은 다음 주에 바로 비자를 신청하고 몇 월 며칠까지 독일로 입국해달라고 하였다. 난 이렇게 쉽게 해외 인턴직을 따냈다는 게 어안이 벙벙해서 혹시 사기가 아닐까 인터넷에 검색도 해보았던 것 같다. 회사 HR에서 정식으로 메일을 받으면서 사기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고 나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로 출국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인턴직은 총 6개월 짜리였다. 내가 사무실에서 가장 나이 어린 직원 언니와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날 정도로 어려서 다들 나를 많이 예뻐해 주셨다. 업무적으로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회사 내의 꼰대 문화를 체험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그건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니었는데도 당시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해당 회사의 인턴직은 사실 업무를 맡기기 위한 자리라기보다는 각 기업별로 인턴으로 채워야 하는 머릿수가 있어서 의무적으로 뽑아 놓는 자리 같았다. 나는 모터쇼 방문 후 시장 조사 및 보고서 작성 같은 재미있는 업무를 한 적도 있지만 그 외에는 회사 내 간식 주문, 회사 내 환경 미화 등 자잘한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회사에서 오죽 깍두기 같았으면(ㅋㅋ) 주말 동안 신나게 논 후 회사 미팅룸에서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미팅룸에 들어오신 차장님이 화를 내시긴커녕 다른 미팅룸에 가서 자라고 하시더라.
인턴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한국 사람들이 독일에 와서 어떻게 직장을 잡고 정착하여 사는지에 대한 패턴을 볼 수 있었다. 독일에서 학업을 한 경우라면 바로 독일 기업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을 텐데 한국에서 학업을 한 경우라면 독일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을 노리는 것이 좋은 길인 것 같았다. 삼성, 엘지, 현대, 기아 등 독일에서도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한국 기업이라면 이력서 상의 좋은 경력으로 남게 되며, 해당 경력을 바탕으로 그 이후 독일 기업 혹은 다른 해외기업으로 이직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또 독일어가 뛰어나지 않아도 독일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분들을 보며 나도 독일에서 직장을 잡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턴 생활을 하는 동안에 지금의 남자 친구도 만났다. 회사에서 만난 건 아니다. 우리가 만난 경로가 굉장히 우연의 연속이며 절묘해서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인연이었나 보다 싶다. 독일 정착에는 남자 친구가 큰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나에게 독일의 언어, 문화, 생활 방식의 전반을 가르쳐 준 것이 남자 친구이고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던 것도 남자 친구의 힘이 크다.
6개월 인턴 후에 나는 그 후로 6개월을 더 독일에 머물며 어학원에 다녔다. 그땐 한국인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던 시기여서 늘 독일어에만 노출되어 있었고 덕분에 언어가 금방 늘었다. 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TV이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 TV가 재미없다고 하는데 나는 독일 TV가 너무너무 재밌었다. 워낙 한국에서도 TV에 큰 흥미가 없었던 사람인데 독일 TV는 나에게 너무 잘 맞았다. 독일 방송 중에서는 일반인들이 나오는 방송들이 많았다. 일반인들이 지원하여 자기 집에서 요리를 선보이는 방송을 매일 저녁 참 재밌게 봤다. 또 퀴즈쇼도 많은데 나는 내가 그렇게 퀴즈쇼를 좋아하는 사람인 줄 독일에 와서 알았다. 언어 능력 향상은 물론 독일에 대한 지식도 늘릴 수 있어서 퀴즈쇼는 참 일석이조의 방송이었다.
6개월의 어학을 마친 후에는 대학에서의 막학기를 보내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졸업하려고 많은 과목들을 끼워서 듣느라 고생 좀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사히 학기를 마치고 졸업 후에 3월에 독일로 돌아왔고 운 좋게 곧바로 취직이 되어 그 해 5월부터 지금까지 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내가 앞에서 꼭 독일이 아니어도 됐다고 말한 이유는, 난 내가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인턴을 했으면 거기에 눌러앉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만큼 거기에서도 운이 좋았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의 나는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오래 지내보았던 이스라엘과 미국도 나와 정말 잘 맞는 두 나라들이었는데 역시 인생은 타이밍인 것이, 나에게 안정이 필요할 때 안정을 내민 것은 독일이었다.
이제 5년을 꽉 채워 살고 있는 이 나라는 고집스럽고 답답하고 투박한 점이 많다.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나의 성향에 딱 맞는 나라는 아니다. 그렇지만 참 살만한 나라인 것은 맞다. 독일에 살면서 신기했던 점, 새로웠던 점을 앞으로 포스팅해보고자 한다.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