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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Oct 25. 2023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

 부정적으로 사는 건 너무 쉬우니까


부모가 되어서 나쁜 점 중 하나는,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과 말, 행동을 쏟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가 없던 시절의 나는 마음껏 세상을 욕했고 부정했고 더러운 점을 들춰냈다. 거기에는 세상은 내가 만들지 않았다는 심리가 반영돼 있었다. 갑자기 세상은 나에게 주어졌는데, 너무 당혹스러운 곳이었다. 갑자기 모르는 차에 태워져 어느 집에 도착해, 폐가 체험을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랜턴을 여기저기 비추며, 여기 뭐야, 무서워, 집에 가고 싶어, 대체 누가 날 여기 데려온 거야, 라며 불만을 잔뜩 쏟아내며 살았다. 그럴 권리가 있고, 또 의무도 있다고, 그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먹이고 재우고 말을 가르치고 남을 때리지 못하게 하는, 그야말로 기본적인 걸 가르치는 육아 기간 동안에는 생각할 시간이라는 게 없었다. 여유가 생기면 목욕탕에 가서 몸을 담그거나 자극적인 유투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육아는 힘든 것이었고, 여전히 나는 세상을 마음껏 욕했다. 이렇게 아이 친화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왜 출산율 운운하는 거야, 옛날엔 방학에 할머니 집에 보내고 사촌들이 있으니 이렇게 힘들진 않았다고, 한둘 낳으면서 왜 힘들다고 징징거리느냐는 말 따위, 사실 직접적으로 듣지도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누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렇게 쏘아주겠다고 혼자 씩씩거리기 일쑤였다.      


아이가 당당하게 의무교육 속으로 편입되고 난 후, 내 시간이 많아졌다. 여전히 나는 부정적인 아우라를 뿜어냈다. 이만큼 키워놨는데 이제 일할 곳이 없네, 억울해, 나이만 먹었잖아 같은 혼잣말을 수시로 중얼거렸다. 아이가 떠나면 벗어놓은 옷가지와 개수대의 그릇들을 정리하며 나는 쓸쓸해 했다. 이력서도 몇 번 넣다가 포기하고,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 연예뉴스의 댓글을 보러 tv 다시보기 웹사이트를 클릭했다.     


코로나 이후 몸이 쇠약해지고 우울증을 겪었다. 상담소에서는 원가족에 대해 물었고, 자꾸 과거로 갔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미래가 밝다면, 왜 과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이 숙제를 봐주다가 때려치우라고 화를 내고, 아, 감정 읽기 해줘야 하는데, 하면서 다시 돌아가 아이에게 사과를 하면서, 그러면서도 이 육아가 맞는 걸까?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아이에게 내가 폐가 체험 같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욕하던 거지 같은 세상, 불공평한 구조, 남을 탓하는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잠시 멈췄다. 의도한 게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다. 생각 없이 살면 그렇게 되는 거구나. 나도 폐가의 귀신이 되어 아이를 두렵게 하고 불안과 공포 속에 옭아매는 거야. 몇십 곱하기 몇십, 이해 좀 못하면 어때, 계산기가 있는 걸. 기분 좋게 드러누워 만화책 보고 있는 아이를 잡아다가 지난 학기 문제집을 들이밀고, 초 3학년에 영어학원 안 가는 애는 우리 애밖에 없을 거라고 불안해 하며 맘카페에서 학원 정보를 찾으며, 그렇게 나도 누군가가 만든 틀 속에 나와 내 아이를 끼워넣고 있었다.      


‘어두운 숲길을 단테와 함께 걸었다’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를 마음속에 새긴 채 자신을 피해자로 규명하면서 살아간다고 말이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어를 ‘도전자’와 ‘창조자’로 바꿔 넣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더 이상 부정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을 거라는 저자의 말이 상당히 감동스럽게 다가왔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 나를 좌절시킬 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도전으로 내가 더 발전하고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방법뿐이다.     

 

불만을 쏟아내는 일은 사실 편하고 쉬운 방식이다. 아이가 학교 가기가 너무 싫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 이유가 나도 그렇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나도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기가 싫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사람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참으며 살지만, 아이가 그렇게 불만을 쏟아낼 때면, 애써 숨겨 놓았던 내 안의 불평불만 스머프들도 깨어나는 기분이다.      


사실 새로운 걸 창조해 가며 살아가는 건 너무나 힘이 드는 일이다. 특히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건 많은 노력과 정성, 상상력이 드는 일이다. 찬거리는 매일 비슷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변화를 주며 새로운 밥상을 차린다거나, 걸레를 손목 관절에 덜 힘들게 짜보는 방법을 연구한다거나 하는 일들도 새로움과 창조의 영역으로 쳐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나 외에는 딱히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또 칭찬을 감사합니다, 하고 기쁘게 수용하는 모습을 나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소득을 올리거나 인스타에 올릴 만한 모습은 아니지만, 스스로 멋지다고 여겨주는 것은 사실 매우 힘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힘이 드니까 내가 해야 한다. 아이는 아직 어리니까, 더 쉬운 일은 아이가 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하고 사랑해도 아이에게 나는 갑갑한 기성세대가 될 것이고, 깨부수고 싶은 틀이 될 것이지만,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깨부술 것이 없는 젊음은 초라하고 당황스럽다) 적어도 내가 만든 틀이었으면 한다. 완전히 새로울 순 없겠지만,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세상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길 바란다.      


간편하게 쓸 수 있는 부정적인 마음은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나는, 간편한 나이 탓은 이제 그만두고, 창조자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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