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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Oct 25. 2023

엄마 쇼츠 봐? 아, 아니.. 명상 컨텐츠...

사실 엄마도 쇼츠가 좋아

"찬장에서 m&n을 꺼내서 신나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낮잠에서 깬 아이가 물었다. 엄마 뭐 먹어? 나는 당황해서 더듬으며 대답했다. 브... 브로콜리..."


어느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다. 이런 기억들은 나에게도 수두룩하다. 아이에게는 야채죽을 끓여주고 뒤돌아서 마카롱을 입에 쑤셔넣는다든지, 실컷 뛰어놀아야 잠을 잘 잔대, 라며 아이를 놀이터에 밀어넣은 뒤 나는 폰에 머리를 박고 '나는솔로'에 달린 댓글을 본다든지 하는, 이중적인 태도 말이다. 양심이 아플 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이렇게 생각해 버리고 만다. 나는 어른이고 살 날도 너보다 많지 않으니까 좀 막 살아도 돼, 하지만 넌 아니잖아? 살아갈 날이 창창하다고. 비유하자면 난 오랫동안 비 바람 맞으며 살아남은 나무고 너는 아직 순이 연약한 새싹이야. 좋은 것만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잠도 일찍 자야 해. 그래야 튼튼한 나무로 성장할 수 있단다.  널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야. 너도 이해하지?


하지만 요즘 들어 이거 하나는 나 스스로도 용납하기 힘들다. 바로 쇼츠를 보기다. 일반적으로 쇼츠는 '그냥 보기'가 힘들다. 그것은 탐닉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러라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프링글스를 세 개만 먹고 뚜껑을 닫는 게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쇼츠의 본질은 탐닉이고, 대부분의 경우 탐닉은 더 큰 자극을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그것은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더욱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폰으로 쇼츠를 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손가락으로 휙휙 컨텐츠를 넘기는 행위는 촉각적 쾌감, 짜릿한 속도감에서 오는 희열도 선사한다. 쇼츠가 나왔던 초창기, '쇼츠는 보다 보면 30분이 순삭'이라는 말을 듣고, '뭐 애들이나 그렇지,' 생각하다가, 아이가 학교에 간 동안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며 손가락과 눈, 귀의 협응으로 1시간을 훌쩍 보내고 '아아 맙소사 이건 아니잖아' 하며 몸을 일으켰던 기억이 있다. 폰을 내려놓자 어지러웠다. 익숙했던 안방이라는 공간이 굴절되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와 이건 정말 위험하잖아, 그날 이후로 나는 쇼츠는 되도록 안 보려고 노력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전철 안에서 쇼츠를 휙휙 넘기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1-2초의 지루함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 유투브를 보는 사람들이 진득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노력은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쇼츠는 좋지 않다, 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더 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응가를 할 때만 잠깐' '저녁 준비 다하고 아이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만' 같은 규율을 나 스스로에게 부과해서 잠깐씩 보는 편이다. 


아이의 폰에는 유투브를 깔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폰을 보니, 신나게 쇼츠를 탐닉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네이버를 통해 유투브로 들어가고, 거기에서 또 쇼츠로 넘어간 것이다. 이미 3학년 아이의 IT 기술은 나의 통제 밖에 있었다. 


나는 절규했다. 아, 안 돼. 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나처럼 되지 말라구. 나는 고인돌과 보글보글에 탐닉하던 나를 떠올렸다. 되도록 전혀 보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기 때문에, 나는 괜찮은 대안을 생각하다가 '폰으로는 보지 말고 컴퓨터로, 시간은 30분 이내' 정도로 타협안을 내놓았다. 


며칠 동안 곁눈질로 살펴 보았는데, '아이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다, 그럴 리 없다, 인간은 그렇게 설계돼 있지 않다'는 내 강한 믿음 때문인지, 아이가 폰만 만지면 자꾸 의심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뚜렷한 증거도 없이 아이의 폰에 깔린 인터넷을 아예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통제가 쉽지 않을 거라 지워 버렸어. 넌 절대 통제할 수 없을 거야. 그런 것들은 통제하지 말라고 만든 것들이니까."


그녀는 눈만 끔뻑거렸고, 나는 내가 정확하게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절반 가량은 쇼츠를 비롯한 세상사의 자극적이고 해로운 것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절반은 이제는 내가 딸아이를 통제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 걱정,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고스란히 딸아이에게 돌려준 느낌이었다. "너는 이제 절대로 딸아이를 통제할 수 없을 거야. 아이는 통제하지 못하게 설계돼 있으니까."


그래도 아이는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검색한다. 오케이 구글, 에게 xx를 검색해줘, 라면서 인터넷으로 타고 들어간다. 그럴 때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이제는 키오스트 주문도 버벅거리는 나는, 뼛속까지 디지털 세대인 그녀에게 경외심도 갖게 된다. 


나 어릴 적에는(라떼는-) 아이들이 만화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면, 그 시간에 독서를 해라, 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이제 나는 아이에게 유투브 그만 보고 넷플릭스에 들어가라고, 타협을 거듭해, 유투브라도 15분 앉아서 진득하게 보라고 말한다. 


3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는 그녀의 아이에게 '쇼오오오오오츠' 그만 보고 '쇼츠'라도 보라고 말할까? 그녀도 아이가 없을 때 몰래 '쇼오오오오오츠'를 보며, 죄책감과 희열을 동시에 느낄까. 


오늘도 나는 설렌다. 내가 나에게 선사한 하루 쇼츠 시청권을 아직 쓰지 않았다. 글을 마치고 할 일 다하고 이따 볼 거다. 이것 봐라, 나는 이렇게 나를 잘 통제하는 어른이다. 조금만 보고 끌 수 있다. 나는 당당하지만, 그래도 쇼츠를 볼 때 너에게 들키면 나는 법문, 또는 명상이라고 대답할 거다. 왜냐하면, 너는 아직 판단력이 미숙하니까. 좋은 롤모델이 필요하니까. 너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쇼츠는 재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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