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어느 날 아이와 밥을 먹던 중, 내가 말했다. “가을 되니까 엄마도 멋을 내고 싶네.” “내면 되잖아.” 아이는 멸치볶음을 집어먹으며 무심히 대답했다. “멋 내기가 쉬운 건 아냐.” “왜?” ”음, 돈이 많이 드니까.” “왜?” 아이가 한 번 더 물었다. “왜냐고?” “응.” “뭐가?” “왜 돈이 많이 드냐고.”
흐음.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면, ‘싸울래?’라는 답변이 나갔겠지만, 아이가 물으니까 새삼 생각하게 됐다. 왜 돈이 많이 들까? 원래 멋 부리는 건 돈 드는 거 아니었나?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걸까? 아이에게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있을 때, 식사를 끝낸 아이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나만 사면 되잖아.”
아이는 명쾌하게 말하고 식탁을 떠났다.
이후 며칠 동안 그 말이 맴돌았다. 하나만 사면 되잖아, 라는 그 짧고 명쾌한 말. 그랬다. 나의 머릿속에서 ‘멋을 낸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우선 뭐가 필요한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옷장뿐 아니라 과거까지 휘저어야 하는 일이다.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십 년 동안 나의 착장은 늘 운동화에 편한 바지, 티셔츠, 에코백이었다. 뭔가를 사고 싶고 예쁘게 꾸미고 싶을 때면, 홈플러스나 이마트 매대에 할인 상품으로 나오는 걸 뒤적거릴 뿐이었다. 어디 번화가에라도 나가서 제철 니트라도 하나 사고 싶다가도, 에이 내가 뭐 입고 갈 데가 어딨다고, 하면서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는 오랜 기간 동안 멋 부리고 싶다는 나의 욕구를 응시하지 않고 계속 방치해 두었다. 멋을 낸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고 아팠다. 아이가 없을 때처럼 구두를 신고 파인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면, 주제 파악을 못하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철딱서니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김창숙이나 크로커다일을 입을 나이도 아니었다. 40대 초반의 아줌마는 어떻게 입어야 멋이 날까,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묻는 것과 다름 없이 어려운 질문이었고, 나는 그에 대답하기가 어렵고 두려워서 아예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늘 입던 것을 입으며, ‘나는 돈도 안 벌고, 애 키우는 게 우선인 주부니까 그래서 이렇게 후줄근한 거야’라면서 합리화하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늘 질투했다. 내 또래의 엄마들 모임에 나가 보면, 확실히 패셔너블하다, 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패션 롤모델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옷은 정말이지 수단에 불과한 듯했다. 자기 삶에 만족하고 명랑한 사람들이 예뻐 보였다. 나처럼 입는데도 태가 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로 명품을 들고 나왔는데도 촌스러운 사람이 있었다.
멋을 부리려면, 상의부터 신발까지 모두 다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내 생각도 멋내기를 어렵게 만드는 점 중 하나였다. 내 옷장에 있는 옷들도 처음엔 모두들 예뻐 보여서 돈을 주고 산 것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무 익숙해져 버린 그것들은 예뻐 보이지 않고, 심지어 구질구질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면 멋을 내려면 그것들을 모두 폐기처분하고 백화점의 마네킹에 입혀진 상하의와 머플러, 자켓까지도 가지고 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은 내 얇은 지갑 사정을 생각나게 하고, 그것은 또 돈을 벌지 못하는 내 상황과도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나는 또 경단녀가 된 내 자신과 사회 구조를 어느새 미워하고, 어느새 나는 부정적인 생각의 악순환 쳇바퀴에 갇힌 흑화된 햄스터가 되고 만다.
하나만 사면 되잖아. 이제부터 멋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명쾌한 말을 떠올리려 한다.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 노래처럼, 신나고 유쾌하게 상하의 중 하나만 사도, 쇼핑을 하러 가는 발걸음이 신나고 유쾌하다면 그게 진짜 멋진 거 아닐까? 백화점에 못 가도,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비싸더라도 정말 마음에 드는 것 딱 하나를 정성스럽게 고른다면, 그 옷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별한 친구를 내 옷장에 있던 익숙한 친구와 소개시켜 주는 거다. 전부 다 새로운 친구들로 내 몸을 휘감으면, 나는 아마도 어색해서 이상한 걸음걸이로 걷게 될지도 모른다.
딱 하나만 사는 거, 그거 괜찮다. 돈도 많이 안 들고, 내 과거를 파헤치지도 않는다. 명쾌하게 올 가을에는 얇은 니트 하나, 그거 딱 하나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