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의 일상에 선물한 빛
어제 저녁, 나는 오래된 나무 식탁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셨다. 그 순간만큼은 평범했다. 하지만 문득 이 식탁이 단순한 나무 덩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무를 베어 이렇게 반듯하게 다듬었고, 네 개의 다리를 달아 사람들이 앉아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일상적인 물건 속에 아리스토텔레스가 2,400년 전에 말했던 ’형상(form)’과 ’질료(matter)’의 관계가 숨쉬고 있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지금 우리와 고대 그리스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간극이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며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선물한다. 그가 『형이상학』에서 풀어낸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물음의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매일 아침 밥을 먹는 나무 식탁은 어떻게 ‘식탁’이 되었을까? 단순히 나무라는 물질만으로는 식탁이 될 수 없다. 누군가가 식탁이라는 ‘형상’—즉, 사람들이 둘러앉아 식사할 수 있는 평평한 면과 그것을 지지하는 다리들—을 구상하고, 그 형상에 맞게 나무라는 ‘질료’를 다듬고 깎아 만들었기에 식탁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형상’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본질적 기능과 목적을 담고 있는 청사진이자 틀이다. 반면 ‘질료’는 그 형상이 실현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은 이 두 요소가 만나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동네 목공소에서 일하는 김 씨 아저씨를 떠올려보자. 그가 식탁을 만들 때, 단순히 나무 판자들을 무작위로 붙이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이미 완성된 식탁의 모습—형상—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이 편하게 앉을 수 있는 높이, 안정감 있게 지탱할 수 있는 다리의 구조, 표면의 매끄러움까지. 그는 이 형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나무라는 질료를 다듬고, 깎고, 이어붙인다. 이렇게 형상은 질료에 목적과 방향을 부여하고, 질료는 형상이 구체적 현실이 될 수 있게 한다.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 때로는 머릿속이 복잡하다. 하지만 잠시 멈춰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가 서 있는 이 작은 공간조차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이 정류장 벤치는 누군가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형상을 구상했기에 존재한다. 여기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피로를 덜어주겠다는 의도, 비와 햇빛을 막아주는 지붕의 높이, 여러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는 너비에 대한 계산이 담겨 있다. 단순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향해 형상화된 공간인 것이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사람의 몸에 맞게 재단되고 꿰매어진 결과물이다. 옷감이라는 질료는 사람의 몸을 감싸고 보호하며 때로는 아름답게 꾸미는 형상을 통해 ‘옷’이 되었다. 심지어 주머니의 위치와 크기, 단추의 배열까지도 특정한 의도와 목적을 담고 있다.
현대 기술의 산물인 스마트폰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리, 금속, 플라스틱이라는 질료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소통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도구”라는 형상이 부여되면서, 이 질료들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스마트폰이 된다.
스마트폰 디자이너들은 단순히 물리적 형태만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용자가 어떻게 정보를 얻고, 소통하고, 즐길 수 있을지에 대한 형상—즉 본질적 기능과 목적—을 구상한다. 이 형상은 물리적 디자인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구조, 화면 배치, 버튼의 위치와 크기까지 결정한다. 질료는 이 형상을 현실화하는 매개체가 된다.
할머니가 끓이시는 된장찌개에도 형상과 질료의 관계가 숨어 있다. 된장, 두부, 채소, 물이라는 질료들은 할머니의 손길—즉, 특정한 형상을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맛있는 된장찌개가 된다. 여기서 형상은 단순한 레시피가 아니라, 할머니가 평생 쌓아온 요리 경험과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까지 포함한다.
할머니는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르실 테지만, 매일 부엌에서 형상과 질료의 철학을 실천하고 계신 셈이다. 질료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사랑이라는 더 높은 형상을 실현하신다. 이처럼 철학은 어렵고 먼 학문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는 단순히 둘 사이의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의존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다. 형상은 질료 없이는 실현될 수 없고, 질료는 형상 없이는 무의미하다. 이 관계적 시각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통찰을 준다.
우리 자신도 신체라는 질료와 그 안에 깃든 생각, 감정, 의지라는 형상의 결합체가 아닐까? 더 나아가 우리의 관계망—가족, 친구, 동료와의 연결—속에서 우리의 존재가 더욱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동네 작은 슈퍼마켓 주인 박 씨 아저씨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건네며 웃음을 주고, 독거노인에게 안부를 물으며, 동네 소식을 전하는 사회적 관계의 중심에 서 있다. 그의 존재는 슈퍼마켓 주인이라는 형상과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 더욱 풍부한 의미를 획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력은 형상과 질료를 고정된 것이 아닌 변화하는 과정으로 본 데 있다. 한 사물의 질료는 다른 사물의 형상이 될 수 있고, 형상 역시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한다. 이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한때 첨단 기술이었던 공중전화부스는 이제 거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형상이 등장하면서, 공중전화의 질료들은 새로운 형상을 만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스마트폰도 언젠가는 다른 형상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처럼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의 흐름 속에 있다.
철학은 거창한 이론이나 추상적인 개념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우리가 만지고 사용하는 모든 것 속에 스며들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개념은 2,4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일상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오늘 저녁, 퇴근길에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잠시 생각해보자. 이 커피 잔은 단순한 도자기 덩어리가 아니다. 그것은 “뜨거운 음료를 담아 사람들이 편하게 마실 수 있게 한다”는 형상이 도자기라는 질료와 만나 이루어낸 작은 예술품이다. 심지어 손잡이의 모양과 크기, 잔의 두께와 입구의 넓이까지도 특정한 목적을 향해 디자인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개념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선물한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가 깃든 관계적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의 미끄럼틀은 단순한 철제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상상력, 모험심이라는 형상이 부여된 공간이다. 동네 골목길은 단순한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과 이야기가 새겨진 삶의 무대다. 심지어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가로등조차 어둠 속에서 안전과 안정감을 제공하려는 형상이 전기와 금속이라는 질료를 통해 구현된 결과물이다.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사소하고 평범했던 것들이 갑자기 의미로 가득 찬 존재로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의문을 품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도 새로운 통찰을 준다. 우리는 어떤 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질료—즉, 우리가 가진 능력, 지식, 경험—는 어떤 형상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회사에서 일하는 서른 살의 김영희 씨는 단순히 회계부서의 직원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만의 꿈과 열정,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때로는 딸로서, 때로는 친구로서, 때로는 동료로서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즉 자신의 형상—을 끊임없이 재구성해 나간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질료이자, 동시에 질료를 통해 실현되는 형상이다. 우리의 삶은 이 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자 춤이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만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은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은 더욱 선명하게 우리의 일상을 비춘다. 형상과 질료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내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집을 나서며 거리를 걸을 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자. 길가의 돌 하나, 가로수의 잎사귀 하나, 지나가는 버스 한 대까지도 모두 형상과 질료의 만남이 만들어낸 존재의 기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2,4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물음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오래된 물음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살아 숨쉬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선물한다. 고대의 지혜는 현대의 빛이 되어, 우리의 평범한 하루하루에 깊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그리고 이 작은 깨달음이 우리의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