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일기
설 명절을 앞두고 퇴근길 라디오에서 '지독한 하루'의 작가 남궁인의 인터뷰를 들었다. 응급의학과 의사인 그에게 명절은 평소보다 훨씬 더 바쁜 날이라고, 어느 명절날엔 혼자서 300명이 넘는 응급 환자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삼백 명?! 나도 모르게 탄식이 튀어나왔다. 연휴에는 평소보다 사건 사고가 많을 테니 응급 환자가 늘겠지, 게다가 다른 병의원이 휴진을 하므로 상대적으로 덜 급한 환자들도 응급실로 몰릴 것이다. 다급한 외침과 신음소리가 난무하고 피범벅의 환자와 가족 친지들로 소란스러운 응급실을 그려보니 몸서리쳐졌다. 그의 책 제목대로 또 하나의 '지독한 하루' 였으리라. 한편 흰 가운을 입고 침착하게 응급실을 누비는 그의 모습에 이르자 그가 어두운 질병의 세계와 싸우는 어벤저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는 호탕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은근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가 출연한 것은 의료 현실을 고발하는 시사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므로 삼백 명, 정확히 305명이라는 숫자는 그의 일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설명하는 단서가 되었다. 자신의 일에서 극한의 기록은 진저리 처지는 기억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종합병원 문전 약국에서 일할 때는 명절이라고 특별하지 않았다. 연휴에는 꼬박 다 쉬었고 연휴 전날은 금요일처럼 오히려 평소보다 한가했다. 외래 환자들이 명절이 임박한 날짜의 예약을 꺼리기 때문이리라. 추석 무렵이었나, 모처럼 한가하여 수다를 떠는데 명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각자가 경험한 최고 조제 기록을 밝히게 되었다. 모두를 압도하는 기록은 어린이 병원 앞에서 여러 해 일했던 약사님이었는데, 혼자만의 기록은 아니지만 명절 연휴 전날 1000건이 넘는 조제를 했다고 했다. 작은 병의원 인근의 약국은 연휴가 되면 보통 그 앞뒤로 바쁘다. 휴일 동안 병의원, 약국이 쉴 것을 대비하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이들은 증상이 급격히 나빠질 수 있어서 소아과 인근 약국은 명절 전에 북새통을 이룬다. 소아과 약은 가루 조제가 많고 시럽, 패치 등 따로 챙기는 것이 많아 조제 과정도 복잡한데,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꼼꼼하고 정확하게 투약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경험한 최대치는 300건이 조금 넘는다. 전에 일하던 약국에서 바로 옆 약국이 보름 정도 문을 닫았을 때 국장님(주인 약사님)과 치과까지 일곱 개 의원의 처방을 처리했다. 집에 오면 아이들 밥 차려주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지곤 했다. 처방 내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두 명의 약사가 해낼 수 있는 최대치를 경험했던 것 같다. 신경과와 정형외과 처방 조제를 하는 지금의 약국도 지난 추석 앞뒤로 무척이나 바빴다. 삼백 건이 넘은 것은 십여 년 약국 역사에서 거의 처음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명절 뒤가 바빠요. 명절 때 스트레스받은 사람들이 진통제, 안정제 처방을 받아 오겠지요?" 동료 약사의 예상대로 명절 뒤가 더 바빴다.
신경과에서 처방받아 우울증 약을 타 가는 그녀도 연휴가 끝나자마자 왔다. 내 또래라서, 언젠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우리 아이들과 또래로 보이는 딸과 함께여서 눈여겨보던 환자다.
"명절에 힘드셨어요?" 처방대로 소염 진통제와 낮은 용량의 신경안정제를 조제해주면서 말을 걸었다.
"안면 근육이 당기면서 아파요. 이러다가 마비되는 건 아닌지 겁이 나서요." 양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특유의 귀찮은 듯한 말투로 자신의 불편을 호소했다. 그녀가 꽤 비싼 브랜드의 옷을 즐겨 입는다고 누군가 말해줬는데, 내 눈에는 늘 후줄근해 보였다. 여느 때처럼 화장기 없는 얼굴에 날씨가 쌀쌀한데도 맨발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었다. 표정과 말투, 몸짓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녀의 명절이 어땠는지 알 수 없으나 세상 살기 싫은 표정으로 안면 근육 마비를 걱정하는 것을 보면 그리 편안하진 못했으리라.
연휴 뒤로 이틀 동안 평소보다 많은, 어마어마한 양의 진통제와 위장약(nsaids로 분류되는 소염진통제는 위장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에 보통 위장약 한 두 가지를 함께 처방한다), 알프라졸람, 디아제팜, 클로나제팜 등의 벤조디아제핀계 신경안정제를 조제했다. 명절 스트레스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밝혀낼 수는 없지만 연휴가 끝나자마자 진통제와 안정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이고 뻐근해, 잠자리에 누우면 신음소리가 절로 났다. 몸은 되게 피곤한데 마음의 긴장이 풀리지 않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실수는 없었는지 낮의 일을 되돌려 보았다. 우울하고 무기력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통제와 안정제가 내게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2018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