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는 시효가 없다

by JLee


번아웃과 우울로 카운슬러 R과 여러 번의 상담을 마친 후였다.


J씨는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 같아요.

혹시 어릴 때 부모님께 많은 인정을 받지 못했나요?


R의 말에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엄마와 나는 짜증 내고 투닥거리고 혼나고 하는 다른 흔한 모녀사이와 다를 바 없기도 했지만, 동시에 둘도 없는 친구 같은 사이이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엄마랑 하루의 일을 조잘조잘 떠들었고, 엄마는 내 친구들의 이름은 물론, 내가 전에 한 다른 얘기까지 모두 기억해 주는 최고의 수다파트너였다.


하지만 R의 말처럼 엄마한테 따뜻한 칭찬이나 인정을 받아 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우리 딸 잘했네

우리 딸 잘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믿어

엄마는 우리 땡땡이를 제일로 사랑해


같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 그런 기억은 없었다.




5년 전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학창 시절 베프였던 친구한테서 톡이 하나 날아왔다.


"J야, 내가 이삿짐 정리하다가 우리 중학생 때 교지를 찾았거든. 거기에 너랑 너희 엄마가 서로한테 쓴 편지가 실려있더라? 너 이거 기억나? ㅎㅎ"



<사랑하는 엄마께>로 시작하는 내 편지에는 내가 당시 했던 고민과 어려움, 그럼에도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는 절절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사모곡은 "엄마, 이따만큼 사랑해요"라는 애정 넘치는 메시지로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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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땡이에게>로 시작하는 엄마의 답장에는 "난 널 보면 답답하다, 엄마말에 순종해라, 성적이 별로면 숙제라도 잘해라, 너 그렇게 살다간 애먹는다" 같은 모진 말로 가득하다.


그 냉정함은 "화이팅"이라는 차갑디 차가운 멘트로 마무리가 된다.


중2병이 최고로 달했던 시기, 내가 그만큼 엄마를 힘들게 했었나, 울 엄마가 나 때문에 많이 지쳐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도 그때 나름의 힘든 이유가 있었을 텐데, 어쩜 우리 엄마는 글에서조차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은 걸까 가슴이 아팠다.


교지 맨 위쪽에 새겨진 [따뜻한 이야기]라는 코너 제목이 무색하게 엄마의 답장에는 따뜻함이라고는 1도 담겨있지 않았고, 서른이 훌쩍 넘은 나는 이십 년 전, 그 열다섯의 소녀 마음이 너무 안쓰러워 남편 앞에서 몇 번이고 펑펑 울었다.




그 뒤로 2년 여가 흐르고 코로나 종식과 함께 드디어 한국엘 가게 된 때였다. 하늘길이 막혔던 그 기간 동안 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엄마아빠한테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어쩌다 그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나는 결국 엄마 앞에서 통곡을 했다.


나 좀 인정해 주지, 나 좀 칭찬해 주지.

엄마는 땡땡이 믿는다 이런 말도 좀 해주고

사랑한다 우리 딸 이러면서 안아도 주고 그러지

왜 그렇게 나한테 차갑게 했어? 응? 왜 그랬어?


엄마... 나 그런 따뜻한 말이 항상 듣고 싶었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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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를 엄마는 어쩌지 못하고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엄마가 이제라도 내 마음을 알아줄까, 금이야 옥이야 뼈 빠지게 키워놨더니 고마움은 모르고 지나간 시간 원망만 한다고 서운한 마음부터 드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면서도 당시 나는 내 마음 지키는 게 무엇보다 소중했다. 우울의 늪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던 때라 그 어둡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내 속 얘기를 하며 펑펑 울었다.


순간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울고 있는 내 곁으로 와 나를 꼭 안아줬다.


엄마가 미안해, 이렇게 더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너 어릴 때는 그렇게 못해줘서 미안해.



그 지난날을 이제와 꺼내 놓고 그때 너무 슬프고 아팠노라고 말하는 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해 준 엄마한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사과에는 시효가 없다"고 하던데, 한참 지나 건넨 그 미안하다는 말에 내 마음이 얼마나 풀렸는지, 그 한마디의 힘은 실로 어마어마했고, 나는 더이상 중학생 교지에 실린 그 편지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때 엄마의 그 따뜻한 품은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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