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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공오삼이 Feb 12. 2021

아침에 쓰는 일기

1호 ㅣ똑똑  <on time>

요하네스버그 ㅣ야외일기


어릴 때 일기는 볼드모트 같은 존재였다. 담임선생님이 일기 숙제를 잊어버린 채 종례를 마칠 때쯤 반장이 '선생님 일기 안 써도 되는 거예요?'라고 '그' 단어를 뱉는 순간 교실은 폭탄이라도 맞은 듯 소란스러워지곤 했다. 학기 중에 쓰는 일기도, 방학 내내 써야 하는 일기도 싫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놀다가 숙제하고 TV 보다가 잠자리에 드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왜 손가락 아프게 글씨로 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되어 일기의 핵심을 간파했다. 일기는 대나무 숲 같은 장소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마음껏 외칠 수 있는 하소연의 창구이자 온갖 성질 다 부려도 되는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기능하며 때론 자기 계발의 첫 단추가 되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감정을 쏟아붓고 나면 그 안에서 내가 원하는 진짜배기를 발견하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하루를 기록하고자 장만한 다이어리는 일 년 후 방구석 어딘가에서 발견되곤 한다. 

이번에는 내가 원해서 자의적으로 시작했는데도 이모양인 걸 보니 나는 틀렸어

자조하지 말자. 그게 아니다. 그냥 시간이 안 맞았을 뿐이다. 굳이 일기를 저녁에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퇴근하면 씻기도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양치질만 하고 잠자리에 드는데 언제 일기를 쓴단 말인가! 그렇게 일기는 또다시 볼드모트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침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지나간 하루를 쓰기보다 앞으로 펼쳐질 하루를 상상하며 일기를 쓰는 편이 더 즐거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축년을 여는 <아침 일기 쓰기> 습관 굳히기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ㅡ 스티븐 킹




2021년 2월 ㅣ오늘의 날씨: 적어도 내 마음은 맑음


유독 정신 못 차리는 아침이 있다. 자꾸만 멍 때리고 행동이 굼뜨기만 하다. 오늘 아침이 바로 그런 날이다. 비몽사몽 아침. 전날 격렬한 운동을 했든, 밤늦게 야근을 했든 다음날 아침도 쌩쌩할 때가 있으니 피로와 크게 상관이 없는 듯하다. 다 날씨 때문이다. 


오늘은 특히 어두웠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화들짝 놀라 일어나 보니 핸드폰 속 숫자가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어둠이 여전히 아침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불속에 파묻혀 귤 까먹으며 해리포터 보기 딱 좋은 날씨였다. 커튼 사이로 빛이라도 들어왔더라면 진작에 아침을 감지했을테니 허둥지둥 서두르지 않았을 텐데 어둡고 차분한 아침이 빛을 가려버렸다. 왠지 눈이 올 것 같은 날이다. 


신기하게도 늦은 날은 더 행동이 굼뜨다. 저기압에 영향을 받는 나의 힘없는 몸뚱어리는 유독 흐느적거리고 편두통에 시달린다. 펑펑 흰 눈이 내려 세상을 밝혀줬으면 좋겠다. 불현듯 오래전에 떠난 제주여행이 생각났다. 휴학 중이던 나는 그냥 올레길이 걷고 싶어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고 언제나 그렇듯 잊어버렸다. (일단 저지르고 본다) 떠나는 전날 저녁에서야 첫날 머물 숙소를 예약했고 대충 배낭을 챙겼다. 그리고 '걸으면서 듣기 좋은 조용하며 나직하지만 우울하지 않은 여행용 노래'를 찾아 인터넷을 헤맸다. 정말 거짓말 안 하고 9어절의 모든 키워드들을 조합해가며 음악을 찾았다. 그리고 DUET을 만났다.


짧게 내쉬는 숨소리마저 음악이라고 느껴지는 곡이었다. 아마 예전에도 어디선가 얘기했던 것 같다. 숨소리마저 달콤한 노래라고. 즉흥적인 제주여행 덕분에 알게 된 DUET은 나의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비 오는 날은 센티해져서 DUET을 틀고, 눈 오는 날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즐기려고, 아침 텅 빈 사무실에서 커피를 내리며 여유를 만끽하고자 이 노래를 듣는다. 적당히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고 커피 향이 섞이고 창문 틈으로 찬기가 훅 끼치면서 그 순간의 복합적인 감정의 덩어리들이 나를 따뜻하게 감싼다.


'걸으면서 듣기 좋은 조용하며 나직하지만 우울하지 않은 여행용 노래' 리스트 덕분에 3박 4일의 여정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난다. 결코 땡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배낭 메고 걷던 4시간의 올레길 여정에서 고생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때 듣던 레이철 야마가타의 노래 덕분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DUET을 걸으며 걷던 올레길을 떠올린다. 그러면 마음은 반반으로 갈라진다. '산티아고 음악 리스트를 만들어 지칠때까지 걷고 싶다' 혹은 '올레길도 힘들었으면서 무슨 산티아고야. 그냥 올레길이나 또 가자'. 아직 산티아고행 티켓을 지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오늘 아침 DUET을 들으며 짧은 일기를 쓴다. 창문 아래 두꺼운 햇살을 받으며 춤추는 먼지마저 유독 낭만적인 아침이다.



H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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