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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해 Jul 07. 2023

180일간의 휴직(그때, 이때, 지금)

어렵게 결정했어요.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몇 달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꼭 지금이어야 할까, 지금이 아니면 조금 더 지난 후이면 용기 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예전 몇 년 전 어느 날 그때였어야 했는데 그냥 지나쳐 온 걸까...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때'라는 것이 있잖아요.

나에게 맞는 시기는 누군가에게 이른 또는 늦은 시기쯤 어딘가 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맞는 시기는 내가 무심코 지나쳐 온 여느 날일 수도 있고요.




새롭게 발령을 받아 간 곳은

2023년은 파이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힘이 빠지는 일도 어이없는 일도 많았어요.

여느 사람들과 마찰 없이 잘 지낼 수 있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내 위치는 중간 관리자의 입장에서 관리자와 계원 모두의 입장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어요.


그리고 일이든 사랑이든 어떤 조건이든 깊이 오랫동안 파고 또 파고 파헤치기를 좋아하는 성격인데

발령받아간 곳의 일은 무수히 많은 가짓수의 일들을 빨리빨리 쳐내야 하는 일들이었어요.

'이렇게 그냥 넘긴다고? 여기까지만 알아보고 그냥 일을 진행시킨다고? 다른 기관에서 일 한 그대로 참고하고 우리 기관도 이유 없이 그 전처를 밟는다고? 말이 돼?'라고 생각하는 순간 많은 가짓수의 일들은 순서를 기다릴 틈도 없이 물밀듯이 쌓여갔어요.


20세기 어디쯤에서 볼 법한 막무가내 기관장과 이보다 더 예민할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는 관리자 그리고 중앙기관에도 소문이 파다한 조직 부적응자인 직원... 그 사이 틈 바구니에 껴 있다 보니 중앙기관을 나가서 조금 쉬면서 건강도 챙기고 일하라는 인사팀의 배려는 결과적으로 불구덩이 속에 밀어 넣는 결과가 되었죠.


'이 정도로는 부족해... 이건 규정을 더 찾아봐야 해... 차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성격과 버릇이 어디 가겠느냐마는 돌다리도 항상 두드리는 몹쓸 병과 특이한 성향인 사람들의 개성에 힘입어 2023년은 최악의 몸과 정신 상태가 되었어요.

'아... 이 상태로는 더 이상 무리겠구나...' 생각을 하고 난 후 대학병원의 교수님을 만나고 몇 년째 다니는 한의원 원장님도 만나 몸 상태를 하나하나 체크하였고...


그리고 휴직을 결심하였어요.

정말 쉬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인사팀에 휴직계를 내고 난 후 남아 있는 한 달간 차근차근 일을 정리했어요.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더 이상 일을 벌이지 않으려 애썼어요.

진행 중인 일을 후임자에게 넘겨주기보다는 계획 단계에서부터 후임자가 직접 진행했으면 했죠.(이게 좋던데, 나만 배려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루하루를 버티는 심정으로 출근을 했고 빨리 한 달이 지나기를 기다려 드디어 출근 마지막 날이 되었죠.

정말 거짓말처럼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마지막으로 출근하던 날은 비가 내렸고 사무실 짐을 주섬주섬 챙겨 차에 실은 후

마지막 인사를 하러 사무실에 다시 들어갔을 때 바지 밑단이 빗물에 젖어 있었어요.

웃음이 났어요.

찝찝함이 아니라 얼굴에 미소가 번졌어요.

'아... 이런 게 여유구나. 아주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여유구나.'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 기관을 정말 쏜살같이 빠져나왔죠.




그리고

광안리 바다.

광안대교.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비 내리는 바닷가.


그렇게 일상에서 벗어나 부산에 왔죠.

내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부산, 광안리에 왔죠.

매일 광안리를 바라보고 광안대교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쉬고 먹고 자고

어떤 걱정이나 미련은 일절 생각하지 않았어요.

정말로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어요.


180일 후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또다시 중앙기관으로 들어가 적어도 7년을 미친 듯이 일에 빠져 지내게 되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


지금의 일은

180일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이 시간 동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도 어디든 갈 수 있으며

쉬고 싶은 만큼

자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은 만큼

읽고 싶고 쓰고 싶고 그리고 싶은 만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의 일이에요.


바라는 일은

180일 후에도 중앙기관, 공무원으로 돌아가지 않는 일

당장에는 공무원으로 돌아가더라도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는 초석을 180일 동안 닦는 일


이게 지금의 때

지금 해야 할 '나의 때'이죠.


지금의 때

글. 사진 by 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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