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 재즈 페스티벌에서 위대한 퍼포먼스 펼친 질베르토 질
가슴 벅차오르는 앨범 이미지가 있다. 1976년 작 < Doces Bárbaros > LP 커버엔 질베르토 질과 마리아 베타니아(Maria Bethânia)와 갈 코스타(Gal Costa)와 카에타노 벨로조가 한데 모여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브라질 음악의 영웅들을 융합한 슈퍼 프로젝트이자 브라질 음악사의 역사적 순간을 이룩했다. 음악적으로도 브라질 전통 음악에 재즈와 록 등 서구 특질을 융합한 하나의 조류인 MPB(Musica Popular Brasileira)의 진면모를 들려주고 있다.
네 인물을 주축으로 한 트로피칼리아(Tropicália)는 문학과 영화, 음악을 포용한 예술 사조이자 브라질 군부에 반기를 든 문화 혁명 운동이었다. 이 시기 MPB는 예민한 음향과 노랫말로 독재를 향한 칼날을 세웠으며 결코 유희와 오락으로만 측정될 수 없는 시대의 기록이자 부산물이다. 카에타노 벨로조와 더불어 본 무브먼트의 중심이 된 질베르토 질이 하나의 대중음악가를 넘어 문화사 거인으로 대우받는 이유다.
물론 그와 무관하게 달콤한 넘버들도 많다. 가끔 뮤직 바에서 들려오는 1979년도 곡 ‘Nightingale’과 ‘Sarará Miolo’를 들어보면 실험성 가득한 10년 전 작품 < Gilberto Gil >(1969)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정치색이 덜한 1980년대 부기(Boogie) 계열 작품들이 편하게 듣기에 좋다. 서울숲재즈페스티벌 무대에서도 ‘Palco’와 밥 말리를 재해석한 ‘Não chore mais (No Woman, No Cry)’ 같은 1980년대 곡들을 연주했다.
곱슬머리 아이를 담은 앨범 아트가 인상적인 1972년 작 < Expresso 2222 >가 셋리스트 중심축이었다. 오프닝 넘버 ‘Expresso 2222’와 “껌과 바나나”라는 독특한 제목의 ‘Chiclete com banana’, 록 질감이 강한 ‘Back in Bahia’가 모두 이 음반 수록곡이다. 공교롭게도 다음 날 들은 파울로 디니즈(Paulo Diniz)의 ‘Quero Voltar Pra' Bahia’ 란 곡도 “바이아로 돌아가고 싶다”란 의미이다. 질베르토 질과 카에타노 벨로조가 북동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바이아 주 출신이라고 한다.
70년대 영국 록 뮤지션만큼이나 브라질 음악가들의 도원결의도 잦았고 질베르토 질도 w 직간접적 세례를 받은 동료 뮤지션들의 곡을 몇 차례 소개했다. 동 세대의 보사노바 레전드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의 ‘Upa, neguinho’와 주앙 질베르토(Joao Gilberto)의 명작 < Chega de Saudade >(1959)에 실린 ‘E luxo s ’같은 보사노바 작품들을 리드미컬하게 편곡했고 조빔의 걸작 ‘Garota de Ipanema’를 손녀 플로르 질(Flor Gil)과 콜라보하는 사랑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Back in Bahia’는 공연 후반부 명곡 퍼레이드의 포문을 열었다. 이 곡부터 ‘Andar Com Fé’와 ‘Palco’, ‘Aquele abraço’와 앙코르 두 곡 ‘A novidade’, ‘Toda menina baiana’까지 멈출 줄 모르는 가속 페달을 밟았고 관객들의 열기와 에너지 레벨도 점차 높아져 갔다. 주변 브라질 관객들이 “Andá com fé eu vou / Que a fé não costuma faiá (흔치 않은 믿음으로 열심히 걸어 나갈 거야)”란 멋들어진 코러스를 합창한 ‘Andar Com Fé’ 와 한바탕 춤사위가 펼쳐진 ‘Toda menina baiana’ 는 인종과 문화 화합의 장이었다.
종종 40년대생 고령 아티스트에게서 목격되는 세월의 야속함이 없었다. 한국 오기 전 대규모 일본 투어가 수긍될 만큼 짱짱하고 옹골찬 퍼포먼스였다. 통통 튀던 20~30대 시절 목소리는 세월의 더께를 얹은 중후함으로 변모했고 기타 연주도 능란했으며 젊은 밴드 구성원과의 호흡도 훌륭했다. 완급 조절과 관객의 호응 유도 모두 흠잡을 구석 없는 거장다운 무대였다.
2024년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열 달간 꽤 많은 공연을 보았지만, 이번 서울숲 재즈페스티벌 질베르토 질이 특별한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 브라질 음악이라는 아득하고도 드넓은 대양의 한 축을 담당했던 명장을 가까이서 두 눈으로 지켜봤다는 것, 황혼기가 무색한 탁월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는 점, 음악으로 하나 되는 축제의 장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2023년 7월 공연한 마르코스 발레와 아지무스, 11월에 열릴 브루노 베를레과 이반 린스까지 브라질 뮤지션 콘서트가 이어지는 모습에 브라질 음악 팬으로서 더없이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