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25살에 인천 공항과 함께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항이 개항하기도 전에 입사해서 공항 곳곳을 공사하는 아저씨들에게 문의를 해가며
들어설 시설물의 이름을 알아내어 영문 안내서를 제작하는데 일조했고
유느님이 잔뜩 주눅 들어있는 시절, 이휘재, 강호동 님들과 함께 공항을 찾아
제일 먼저 외국인에게 Thank you를 10번 듣는 사람이 승리하는 코너를 함께 찍기도 했고,
한 번은 단독으로 "다큐 직업의 세계"를 찍기도 했다.
그때는 참 날씬해서 착 달라붙는 K항공 유니폼도 가뿐하게 소화해 내고
그놈의 스카프를 꼿꼿이 세우고 완벽하게 올림머리를 하는데 아주 열중했던 때가 있었다.
흉내를 잘 내는 덕분에 배운 적 없는 일본어 방송문도 곧잘 해서
나는 방송문 교육을 전담하게 되었었고,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가느라 찾은 다른 공항에서
조금이라도 어색한 혹은 잘못된 안내 방송을 듣게 되면
"어머 웬일이니, 다들 방송 교육 다시 받으셔야겠네" 속으로 말하며 건방지게 우쭐거렸던 듯하다.
학교 다닐 때는 나름 공부를 잘했다.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는 본고사도 전국 1등을 했고, 비록 본고사에서 수학은 0점을 맞기도 했지만,
일반 시험에서는 수학마저 문제와 답을 외워서 연세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었다.
고3 때 연세대가 본고사에서 프랑스어를 빼고 수학으로 전형을 바꾸면서 연세대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학생 시절은 알차게 공부를 했고, 토익 점수도 좋았고, 직장도 힘든 면접을 몇 번씩 거치면서 들어갔더랬다.
비행기가 지연되고, 눈이 오고, 안개가 낄 때마다 손님들은 신문으로, 여권으로 내 머리를 때렸고,
한 번은 손님이 던진 트렁크를 피하려다 손가락에 금이 간 적도 있었다.
그날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비행기가 푸시 백을 할 때 기장을 향해 잘 다녀오시라고 손을 흔들 때에서야
내 손이 부어 올라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었다.
엉엉 울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어렵게 모든 관문을 통과해서 좋은 직장을 얻었는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사람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일해야 하는 거야.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지가 않아.
엄마의 전격적인 지지로 항공사를 그만두고, 서른이 넘어 외국 생활을 전전하게 되었다.
대학때 어학 연수로 잠깐 살아본 밴쿠버의 상큼하고 희망찬 나날들과는 사뭇 달랐다.
말레이시아에서도 몇 년 일해보고, 인도네시아 빈탄에서도 일해보고, 싱가포르 P사에서도 일을 했다.
소위 말하는 진상은 서비스직에서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가는 곳 모든 곳에 각각의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동료와 함께 "진상 보존의 법칙"에 대해 낄낄 거리며
이제 그만 일하고 싶다, 결혼하고 싶다 라고 했다.
남편 하나만 내 고객이면 그래도 사랑하니까
남편이 진상 부려도 잘 핸들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어쩌다 보니 지금 나는 원하던 대로 백수다.
아니 나의 직업은 전업 주부이다. 엄연히 집에서 많은 일을 최선을 다해하고 있다.
한참 코로나가 심했을 때는 배달 요리도 안 시키고, 연달아 90끼를 요리했었다.
신랑을 따라 경주에 살고 있어서 가볍게 영어를 가르쳐보려고 했는데, 신랑은 방학 때마다 자기를 따라
여행 가길 바라니 학원은 다닐 수 없고, 과외도 방학 때는 못하니까, 대입 특강 위주로 하다가
코로나 이후로는 과외도 폐업 신고를 했다.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나는 주말이면 현 남편 구 남자 친구의 스포츠 생활을 따라다니느라 김밥을 싸서
대구, 부산, 청주를 돌아다녔다.
코로나 이후 모든 게임이 중지되었다가, 지난가을~겨울에는 소프트 볼 리그는 개최되어서 주말 내내
남편만의 '워터 걸'을 자처하며 대구 방천 야구장과 효진 야구 공원을 매주 따라다녔다.
신랑은 한국에 형성되어 있는 외국인 스포츠 리그를 통해서 아는 친구들이야 많지만
당연히 가족이라고는 나와 우리 친정 식구밖에 없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도시에 신랑만을 믿고 와 있기에 우리 둘은 어디를 가나 함께 다니고
그의 취미 생활은 나에게는 소풍 가는 날처럼 여겨져 나는 기꺼이 함께 즐기고 있다.
그러나 간혹 어떤 사람들은 나를 "일하지 않기 때문에..."로 모든 걸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일하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 요리를 하고, 일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을 따라다니고,
일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에게 이것 저것 챙겨주고 등등.
또 어떤 이는 도대체 쟤가 무슨 수로 미국인 남자를 하나 잡아서 집에서 놀고먹나 라는
시선으로 보곤 한다. 아니 직접적인 물음이였다. 어떤 방법으로 이 어메리칸 보이를 잡아 챘냐고 했다.
그것도 미국 우월주의 아닌가. 왜 내가 잡아챘다고 생각해요?
미국 남자가 일등 남편감이니 반드시 잡으시오 라고 어디 공시되어 있나요?
그리고 누가 누굴 잡은 게 아니고 서로 좋아서 만난 거예요.
살면서 사랑에 빠져본 적은 있는 거죠?라고 말해줄걸.
맨날 당하고 나서 혼자 있을 때 받아 칠 말이 생각 날 건 뭐람.
어쩌다가 내가 싱가포르에서 일한 얘기가 나오니 도대체 네가 거기서 뭘 했냐고 물어본다.
여권도 없이 어디 시골 산골 마을에서 살다 온 사람 취급을 한다.
40년을 내가 놀았을 거 같니 라고 되받아치고 싶지만 분위기를 망치고 싶어 하지 않는
한국인의 특성인지 아님 슬퍼도 화나도 웃으며 일해야 했던 항공사 노예근성이
DNA에 깊숙이 박힌 탓인지 그냥 웃으며 일했어요 라고 대답하곤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이런 편견 어린 시선으로 대하는 건 모두 여자다.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구구절절 읊어주고 그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인정 필요 없으니 관심도 가져주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
다행히 남편의 찐 베프들은 칠칠맞은 남편을 잘 맞춰 돌봐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며
24시간 356일 휴일 없는 일이라고 치켜세워 주고, 신랑도 보란 듯이
자기는 행운아라며 내 덕분에 자기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고맙다고 해준다.
요즘은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일하는 주부, 엄마가 늘고 있는 추세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내 인생을 추세에 따라서 살 필요는 없는 것이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으로
내가 전업 주부를 하고 있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설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 인생을 서른 혹은 마흔 쯤 살았다면 누구나 묵묵히 자기가 걸어온 인생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숨 쉬는 운동만 하며 나이를 먹은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 또한
설사 자신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겠지 라고 생각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배우 서이숙 님이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나와서 출연진이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해도
"어머, 너무 창의적인 생각이다. 멋있다"를 연발하면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려 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너무 보기 좋았다.
부디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남을 내가 살아온 관점에서 재단하는 사람이 아닌 나에게 없는 장점을 찾고 열린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렇다면 그들이 나를 이런 편견으로 대했다 가 아닌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는구나.
로 태도를 바꿔야 겠다. 덕분에 이런 글을 쓰며 나를 다독일 수 있어 고맙다 해야겠다.
그녀가 또 나에게 너는 미국인이 아니라 모를거야 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며 혼자 떠들어대도
맞아요 나는 한국인이라 몰라요 하하하하하 웃어버려야 겠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괜히 애꿎은 신랑에게 화풀이하지 않기.
시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하자 "Kindness is the great weapon to kill mean people"
나는 그저 나의 소중한 하루 하루에 감사하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라고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나.
흔들려도 좋으니 다만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서 나를 지키며 살아가자.
오늘은 뭘 해 먹나가 지상 최고의 심각하고 행복한 고민인냥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