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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여자미국남자 Jan 22. 2021

겨울비 내리는 날

아늑한 하루

몇 주 동안 곳곳에 수도관을 동파시킬 정도의 매서운 추위가 맹위를 떨치더니 어제부터는 영상으로 기온이 올라 겨울비가 살금살금 내리고 있다.

아직 1월 중순이라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이 비가 봄을 재촉하는 비 인듯해서 봄을 맞을 생각에 마음 한편이 괜히 설레어진다.


나는 비가 좋다.

비 내리는 냄새가 좋고, 동글동글 또르륵 창문에 맺히는 빗방울이 너무 이쁘고, 비 오는 날은 온 세상이 제 각각 지닌 색깔이 더 선명하게 빛나는 거 같아 비 오는 창밖의 세상이 좋다.

여기서 포인트는 나는 젖지 않는 아늑한 실내에 있다는 것이다. 큰 통 창으로 비 오는 세상을 감상하며 한 손에는 커피 한잔을 들고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커튼을 열어젖히고 마당 구석구석에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커피가 갑자기 너무 마시고 싶다. 마치 커피 한잔만 마실 수 있다면 세상에 얼마나 행복할까. 이건 사실 거짓 신호이다.

커피를 마셔야만 행복해지는 게 아니고 마시지 않겠다 하고 못 마신다 생각하니 커피가 괜스레 더 그립게 느껴지는 거신 신호.


나는 알량한 커피 한잔으로 뭔가 크게 희생하는 냥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어머님의 건강 회복과 맞바꿔 달라 한다. 더불어 기도 말미에는 내가 원하는 다른 소원 하나도 끼워 넣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시곤 "얜 도대체 뭐야? 커피 한잔 내주고 나한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닌가"라고 하실 듯. 그럼 난 또 떼를 써야지. 죄송해요, 전 보잘것없는 인간이라 커피 한잔 내드리는 것만으로도 뭔가 큰 일을 한 것만 같다고요. 그냥 커피 자체를 보시지 마시고, 제가 뭔가를 위해 노력한다는 그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제 맘 다 아시죠? 귀여운 척 윙크도 한번 날려 드리자.

하나님이 어이가 없어 귀찮은 애 소원일랑 빨리 들어주고 한동안 조용히 하라고 해야지 하셨으면 좋겠다.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던 덴마크의 어느 겨울날도 문득 생각이 난다. 덴마크의 수도도 아닌 알보그 라는 처음 들어보는 도시에서 한 일주일간의 휴가를 보냈다. KLM을 타고 싱가포르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간 후 환승을 해서 알보그로 가는 비행기 안에는 동양인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바이킹의 후손답게 모두가 체격도

크고 키도 크고, 마치 거인들의 나라를 향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서 몇 바퀴를 선회한 후에도 비행기는 착륙할 수 없었고,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도시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항공사가 준비한 버스를 타고 2시간 반 정도를 가면 알보그 공항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걱정과는 달리 버스도 우등 

고속버스보다 좋았고, 빵도 주고 음료수도 주어서 덕분에 로드 트립까지 하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 도시는 길을 걷는 모두가 모델인 듯 보였다. 내가 여자라서 그럴까 이쁜 여자들보다 잘생긴 남자들이 더 눈에 띄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친절했다.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아니면 유명하지 않은 도시라 그런지 출장 온 사람들을 빼면 호텔에도 여행객으로 보이는 이는 없었고, 더더군다나 동양인은 어딜 가든 나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내가 신기했는지 가는 곳마다 친절하고, 내가 마트에서 봉투를 못 찾아도, 돈을 세어보려 시간이 걸려도 모두 환한 미소로 괜찮다며 기다려주고, 도와주기까지 했다.

오후 4시 반이면 해가 져서 박물관, 미술관은 오후 4시까지 영업을 했고, 식당들도 일찍 문을 닫았다.

휴가기간 동안 날씨가 많이 춥지 않아 눈 대신 비가 자주 왔다. 한적한 공원에는 1미터 간격으로 음악이 

나오는 기둥이 한 50여 개는 세워져 있었던 듯한데, 안개 낀 공원에서 좋아하는 건센 로지스의 노우벰버 레인을 들으면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져 천국으로 가는 구름을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좋은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중세풍의 멋들어진 이국적인 건물 때문인지 지금껏 살면서 비가 와서 가장 예쁜 도시는 내가 본 중에서는 덴마크 알보그이다.


비가 가진 장점 중의 하나인 듯하다. 스르륵 추억 여행에 젖게 해주는 것. 

분명 비 오는 어떤 슬픈 기억도 있을 듯한데, 늘 상큼하고 행복한 기억만 떠오르는 걸 보면 나쁜 기억은 

비가 내리며 다 씻겨져 나갔나 보다. 비의 장점 하나 더 추가.


이렇게 아늑하고 감사한 하루가 비와 함께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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