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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May 23. 2021

시말서고 뭐고 퇴사나 할걸

사회초년생은 이 모든 폭풍이 처음이었다


스물여섯, 그럴싸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패션디자인과를 졸업하고, E사 의류 브랜드 스토어에서 현장 아르바이트를 겸하며 취업 준비를 했다. 그리고 모 의류 쇼핑몰에 정식으로 입사를 하게 됐다.


좁은 가정집을 개조한 듯한 공간이었다. 아이보리색 벽지와 체리 우드 몰딩. 낯설지만 분명 친숙했다. 그 한가운데엔 색상도, 높이도, 어느 하나 맞는 구석 따위 없는 책상들이 얼기설기 붙어 있었다.


첫 월급은 100만 원이었다. 그마저도 월급날 제때 맞춰 나오는 일은 없었다.


월급날을 기점으로 며칠은 내내 대표와 팀장을 쫓아다니며 볶아야 했다. 그래야만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월급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굴었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어느 누구도 맡기지 않은 총대질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출근 시간은 아침 9시. 이를 지키는 사람은 놀랍게도 나 하나뿐이었다. 왜지? 왜 다들 출근 시간에 맞춰 나오지 않는 거지? 처음엔 내가 출근 시간을 잘못 알았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 말고 모든 사람이 느지막이 아침 10시 이후로 하나, 둘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었다.


"팀장님, 저희 출근 시간 아침 9시 아닌가요?"

그래서 물어봤다. 11시까지 이어지는 출근 파티에 내가 모르는 신개념의 출근 방식을 도입하고 있는 건 아닐까?


"뭐, 공식적인 건 그렇긴 한데 어차피 다 늦게 오는 거 혼자 맞춰서 와봐야 손해밖에 더 보냐?"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당혹스러움을 차마 감추지 못해 표정에도 여실히 드러났을 것이다. 뒤에 이어진 팀장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너도 늦게 와, 그니까. 뭐 하러 일찍 오냐? 그런다고 돈 더 안 준다."


하지만 나는 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언제나 어김없이 아침 9시 출근 시간을 오로지 혼자서 지켜냈다. 남들 다 그렇게 하니까 나 또한 묻어가며 동화될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꼿꼿하게 고집을 부리며 아무도 지키지 않는 출근 시간을 지킨 이유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계약을 그렇게 했으니까. 나에게는 그게 규칙이고, 룰이고, 법이었다.




"내일부터 일주일 간 지각 안 하고 오는 사람, 내가 인센티브 줄게."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구석방 안에서 제품 재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오랜 업무로 녹아내린 정신을 단번에 깨운 발언의 주체는 단연 대표였다. 팀장은 오랜만에 알람 맞춰 일어나야겠다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이게 회사 맞나?


"야, 넌 좋겠다. 하던 대로만 하면 되잖아."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알람을 맞추고 있는 팀장을 가만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할 말은 많지만, 차마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간 내 마음의 땅은 전부 메말라 죽어 버린 줄 알았다. 규칙적인 생활을 빌미로 기계적인 삶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어쩌면 지금도 애쓰는 중일지 모르겠다. 남들도 다 이렇게 고생하고 산다니까 이 길이 맞는 거겠지, 고작 이렇게 지칠 수는 없는 거라고. 하지만 여전히 작은 불씨는 살아있었다. 꽁꽁 자취를 감추고 숨어 있던 그 불씨가 별안간 명치를 치고 화르륵 타올랐다.


옛말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다. 계획하지 않은 날에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에 주로 쓰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나는 지각을 계획하지 않았으나, 지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출근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구구절절 사유를 따지자면, 열차의 연착이었다.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면 그건 또 거짓말이다. 옴짝달싹 못한 채 지하철 한가운데에 갇히는 상황이 그날, 나에게, 하필이면 일어날 줄이야.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한달음에 뛰어다녔다. 환승 구간에서도 카드를 찍으러 가는 길목에서도 우다다 뛰었다. 누가 봐도 '저 사람, 아무래도 지각인가 보군' 싶을 정도로 헐떡거리며 바람처럼 쏘다녔다. 


그러나 나는 신발장 앞에서 1분 지각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나와 함께 현관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던 팀장은 마룻바닥에 발이 닿아, 간신히 세이브를 했다. 나는 마룻바닥 밖의 신발장에 여전히 발이 닿아 있어 지각자가 된 것이다.


"오늘까지 시말서 써내."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노래 듣는 걸 좋아해서 자주 듣다 보니, 귀에 벌써 문제가 생긴 걸까. 너무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벙쪄서 되물었지만, 점심 이후에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시말서를 써서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는 말을 끝으로 대표는 나갔다.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웃기지도 않았다.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팀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함께 당혹스러운 듯 보였지만, 결국 어깨나 한 번 으쓱이고 마는 뻔뻔한 태도에 차게 식은 심장이 또 한 번 부글부글 끓었다. 이러다 화병 나겠다, 정말로.



"팀장님, 다들 단 한 번도 출근 시간 맞춰서 출근한 적 없죠. 그건 팀장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저 혼자 매번 꼬박꼬박 출근해서 업무 준비 다 했어요. 제가 오늘 지각한 이유는 계속 말씀드렸지만 전철 연착 때문이에요. 이 부분은 연착 증명서도 증빙해 드릴 수 있어요."

"..."

"...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너무, 너무 억울해요. 대표님 회사니까 대표님 마음대로 하는 거 맞는데요. 부리는 직원들한테 먼저 줄 돈부터 제때 주셔야 그것도 인정이 되는 거 아닌가요? 솔직히 매일 야근하고 있는데 그 돈 받을 생각은 이제 하지도 못하겠고요, 기본급 주셔야 할 것도 제대로 안 주시면서 갑자기 일주일간 지각 안 하면 인센티브 준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떻게 나와요. 팀장님이랑 동시에 들어왔는데 제가 신발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시말서까지 작성해야 하는 이 상황이나 이유가 도대체 납득이 되질 않아요."

"아니... 뭐, 네 입장도 이해는 가는데..."

"팀장님, 그리고 다른 분들 전부 다 밥 먹듯이 지각하는 동안 아무 말 않으셨잖아요. 그 사이에서 저 혼자 꼬박꼬박 시간 지켜가면서 나온 거 알아달라고 제가 요청한 적도 없어요. 저도 사람이라, 억울한 적은 물론 많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은 안 되죠. 안 되는 거잖아요, 팀장님."


팀장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월급 언제 주실 거냐고 물어볼 때마다 봤었던 특유의 그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더 받을 상처는 없었다. 다만 이제 정말 속이 상하기 시작했다.


"대표님이 다른 것도 아니고... 하, 어제 말씀하신 거잖아. 무려 어제! 근데 그걸 오늘, 다음 날 바로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대표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나지 않겠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너 이거 대표님 무시한 꼴이나 마찬가지야. 그것도 알아야지."

"팀장님이 저를 이런 식으로 모함하시면 안 되죠. 대표님을 무시했다고요, 제가? 제가요? 팀장님,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저한테 지금 그렇게 말하시는 거예요? 연착을 제가 시켰어요? 그리고 지각 안 하면 인센티브 준다는 건 무슨... 회사 출퇴근이 장난이에요? 무시는 제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게 무시죠! 여태 제대로 다닌 저만 호구 만드는 거잖아요! 순서가 있다면, 정말 직원 챙기는 마음에서 생각이란 걸 하셨다면 저부터 독려해 주셔야 맞는 거예요. 기본적인 대우가 되어야 맞는 거죠. 무시는 지금 누가 당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을이 갑을 무시해요!"


결국 팀장과 나의 언성이 높아졌다. 지붕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평정이라는 것이 나에게서 완전히 휘발된 듯했다. 팀장의 주장은 도돌이표였다. 어쨌든 대표를 무시한 태도나 다름없고, 시말서는 대표가 쓰라고 했으니 어떻게든 쓰라는 것이다. 목구멍까지 울분이 차올랐다.


"그래, 너 잘했고 열심히 한 거 알겠다고! 아는데 오늘은 어쨌든 지각했잖아! 아, 좀 그냥 시말서 하나 대충 쓰면 될 거 가지고 진짜 이럴래?"


나는 상황과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시말서를 끝까지 거부했다.


"제가 잘못한 게 있어야 쓰죠. 전 제 잘못을 도무지 모르겠어서 시말서 못 쓰겠습니다. 팀장님이 쓰세요, 그럼."


이성의 끈이 제대로 끊기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팀장은 그래도 이름은 네 걸로 올라가야 하니 본인이 쓰란 대로만 쓰라고 거기까지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부탁을 가장한 강요다. 갑을 관계에서 을을 맡고 있는 나에게 사실 선택권이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지각을 함으로써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회사 분위기를 혼란스럽게 만든 점에 깊이 죄송합니다.'


팀장이 읊는 내용 그대로 시말서에 옮겨 적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사기를 떨어뜨려? 회사 분위기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깊이 죄송해? 나는 어느 문장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오후 느지막이 대표가 다시 사무실에 등장했다.


"시말서 썼어? 가져와서 여기 붙여 놔."

"..."

"여기 중앙에 잘 보이게 붙여 놓고, 볼 때마다 새겨."


명치를 지난 스파크가 머리꼭지까지 올라와 파바밧 터졌다.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가 화르륵 뜨거워지길 반복했다. 단전에서부터 비집고 올라오는 덩어리는 무엇일까. 수치심? 분노?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겼다. 내 손에 들고 있는 시말서도 똑같이 찢고 싶었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결국 퇴사라는 단어를 입밖에 꺼냈다. 시말서고 뭐고 진즉 퇴사나 할걸.


"너 이쪽으로 다시 발 들일 생각은 하지 마라?"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협박조로 이야기해 왔다. 머릿속이 멍하기도, 어지럽기도 했다. 심장은 쿵쿵 날뛰었다. 고막까지 생생하게 전해질 정도로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바깥까지 이 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그건 또 싫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네."

이 일 아니면 내가 할 게 없을까, 여차하면 다른 일 배워 보자는 심산으로 호기롭게 대답했다. 한편으로는 망했다, 어떡하지 앞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단단히 잘못 꿴 첫 단추를 발견하기까지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험한 바 깨달은 건 많았지만, 굳이 겪어야만 했던 과정이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나의 선택에 의해 벌어진 일들이라 기가 막히기도 했다. 처참한 실패다. 얻은 건 무엇일까. 회사 잘 알아보고 들어가야겠다, 앞으로 이런 곳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미련 없이 뛰쳐나오자, 그런 당연한 것들을 얻었다고 할 수 있나.


나는 단지, 내 이력의 첫 시작이 될 발판을 멋지게 만들고 싶었다. 나에게 먼저 당당하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고, 성실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잘 된 것 같지는 않지만 마음가짐은 그러했다.


그 숱한 출퇴근 길마다 차도에 내 한 몸을 전부 내던지고 싶었던 충동에도 다시 '버티자' 번번이 다짐하고 다시 결심한 이유는 나를 위해서였다.


퇴사를 내지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서럽게도 울었다. 첫 취업, 첫 회사, 첫 사회생활, 첫 지각... 그리고 첫 시말서. 이토록 폭풍 같은 성장통이 나에게 남긴 숙제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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