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무던 Aug 18. 2023

너 참 잘 꼬신다, 나를.

11월과 12월 사이, 넷.

11월과 12월 사이, 넷.

틴더는 그렇고 그렇다. 모두가 틴더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부정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한 바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아웃풋이 굉장히 달라진다고 말하고 싶다. 나 또한 그렇고 그런 일이 왜 없었겠냐만 나의 대처는 아래와 같았다.


당신의 취향은 존중하지만 나는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원하진 않습니다.

저 또한 당신에게 무해할 테니 당신도 제게 무해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이브나 술 한잔 하기 전에 산책을 먼저 해봅시다.


상처받지 않은 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나 또한 고결한 캐릭터로만 남아있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나를 나쁜 년이라 욕할 테고 누군가는 틴더를 거지 같은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내가 나쁜 년이 된다면 그건 틴더여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연애에 임하는 태도 때문일 테다.


어쨌든, 어떤 이유에서든 틴더를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틴더를 시작하기 전 만남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고, 거절의 말을 어려워하지 말고, 불쾌감이 든다면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거나 분명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의 멘탈이 이 모든 것을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면 틴더로 시작하는 연애는 정말 별게 아니고 별것도 없습니다.









그와 나는 문득 귀신같이 깨닫고 말았다.

지금, 이 헤어짐의 타이밍을 놓치면 우리의 첫 만남은 아주 아주 길어질 것이라는 것을.






비가 오지게도 왔다. 신발이 양말인가 싶을 정도로 젖는 바람에 발가락이 세로 주름이 잡힐 정도로 불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만 집에 가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평소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희한한 순간인지 공감해 줄 테다. 본인은 외출을 하기도 전에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고는 약속을 취소하는 매정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트위드 H라인의 롱 스커트 덕분에 보폭은 평소의 반절도 안 됐으면서 울퉁불퉁한 연남동의 구정물 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애를 썼다. 펄쩍펄쩍 잘만 뛰어오르다 이 정도면 마포구를 가로지르겠는데? 싶은 웅덩이를 발견했을 때 겸허한 태도를 갖췄다. 그래, 나에게 신발은 없는 거야.


풍- 덩


으아악 소리를 내도 손 한 번 붙잡아 주지 않던 그를 보며 속으로 외쳤다. 염병할.


지난 나의 연애는 매우 수동적이었다. (라는 걸 그를 만나고 알았다.) 여기서 '수동적'이라는 것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살아본 적도 없는 구한말 적 연애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혼자 고고한 척 손 하나 까딱하질 않았다. 무수공주처럼 굴었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매사 '네가 날 좋아하니까 뭐~.'의 태도였달까. 그만큼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수없이 선을 그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글을 연재하면서 종종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꽤 오랜 연애를 마무리하고 또 그만큼 혼자의 일상을 보내다 보니 감정 앞의 자존심은 대기 속에 부유하는 먼지 한 톨만큼도 아니었다. 좋은 것에도 싫은 것에도 솔직하면 인생은 더 간단해졌고 더 명료해졌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빗줄기에도 집은 조금 있다가 가겠다 했다. 너랑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그는 또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알았지, 이 남자가 내가 만난 인류 중에 가장 밀도 높은 프린세스라는 것을.


그런데 뭐 간혹 프린세스가 프린스가 되기도 하더라.

그게 뭐든 해본 놈이 잘한다고, 앞자리가 같은 '프'이지 않은가. 허허.










"여기 있어."


연남동 어느 집 처마 밑에 나를 넣어놓은 그는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겅중겅중 뛰어 사라졌다. 우산도 없는 나를 여기에 이렇게 버린다고? 영문을 몰라 당황한 채로 빗줄기만 바라보고 있었더니 어딘가에서 내 이름이 불렸다.


호명당하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동생 콜렉터인 나는 그들과 존댓말을 하는 관계를 유지하곤 했다. 나름 최대의 애정 표현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나를 차마 'OO아.'라고 부르지 못했고 직급으로 불리는 회사에서는 더 말을 얹을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동갑내기 이성친구는 인생에 처음이었다. 동생 콜렉터인 나는 그런 쪽으로도 그러했다.  


아무튼, 좁은 골목에 있기엔 과분한 규모의 편의점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는 나긋한 손짓을 했다. 쟤가 저렇게 생겼구나, 내가 시각적 자극에 이토록 취약한 인간이었던가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란다고 갔네.


"발 몇이야? 이거 맞을 것 같은데."

"응?"


그가 보여준 건 235mm 삼선 슬리퍼였다. 혹시나 오해를 살까 걱정인지 슬리퍼를 든 손은 문턱을 넘지 않았다.


"이거 나한테 작아."

"들어와 봐."

 

물컹물컹 양말일지 신발일지 모를 것에서 빗물을 짜내며 들어간 곳에는 사이즈별 삼색 슬리퍼가 쌓여 있었다. 이 중에 내 사이즈를 골라 보란다. 어허, 이 놈 보소. 235mm 슬리퍼를 골라 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너 참 잘 꼬신다, 나를.


나는 오만상을 쓴 채로 245mm 슬리퍼를 집어 들었다. 발 밑에서 물이 막 나와. 으으.

내 손에 있던 슬리퍼는 그의 손에 맡겨졌다 오롯이 내 것이 되어 돌아왔다.


"양말 벗고 신어."


흙탕물을 야무지게도 먹어버린 흰 양말을 대체 어쩌나,라는 생각이 줄줄 새고 있었는지 어느새 내 앞에 쪼그려 앉은 머리통이 바빴다.


"신발 벗어봐."


축축하고 찝찝한 느낌을 참을 수 없어 단말마를 내뱉는 동안 그는 내 양말을 벗겨내고, 여전히 젖어있고 당연히 예쁘지도 않을 발에 삼선 슬리퍼를 끼워 넣었다. 굳이 끼워 넣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250mm 신발의 넉넉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게 어디든 통풍이 잘 되어야 견딜만하지, 암만. 그런데 난 왜 굳이 스타킹에 양말까지 야무지게도 챙겨 신었던가.


젖은 발을 습기로 옥죄는 꿉꿉한 기분에 사로잡혀서인지, 나는 그가 아까와는 달리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말했던가,

우리 여기 잠깐 서 있다가 가자.


머리 위로 조그마한 비닐우산이 펼쳐지는 걸 보면서도 모르는 척, 빗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그의 가죽 자켓을 파고들어 팔짱을 꼈다.


인생 본 적 없는 직진을 해놓고는 얼굴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서 다시 한번 우렁차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자켓 안 주머니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




너 진짜 잘 꼬신다, 나를. 염병할.









틴더에서 시작한 연애도 별거 없어.
11월과 12월 사이, 셋.
매거진의 이전글 첫 만남의 연장전이 시작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