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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던 Aug 15. 2023

첫 만남의 연장전이 시작됐다.

11월과 12월 사이, 셋.





소개팅에 질릴대로 질려버린 때였다. 누군가를 만나고는 싶지만 조건부터 들이대는 상도덕이 싫었다. 나의 조건이 별로였나 하면 맹세코 절대 아니다. 나는 지금도 자신있다. 다만, 누군지 알지도 못한 채 함부러 타인의 삶을 내 기준에 맞춰 평가하고 판가름 하는 것은 너무나 시건방진 태도가 아니던가. 동방예의지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양반 집안에서 막내 딸로 나고 자란 나는 더욱 말이다.




사람이 기품이 있어야지, 에헴.




물론, 웃자고 하는 말이다. 양반집 기품 있는 막내 딸이 틴더를 하는 것도 누군가는 우스울 것이 분명하니까. 명확한 기준과 사유에서 근거한 컨디션 체크는 때로 매우 영특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나와 맞지 않을 뿐. 혹은 그러한 컨디션 체크가 불필요한 삶을 살고 있던가.










그 다음은 연남오뎅이었다. 빈 곳 없이 마구잡이로 내리던 비가 소강되고 멀찍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던 그와 나는 연희 교차로 밑을 지나며 첫 만남의 2막을 열었다. 어쩌다 연남오뎅을 가게 됐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배가 잔뜩 부른 우리는 더 이상 위를 확장시키지 않고도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을 찾았을 테다. 분명 정처없이 떠도는 핫플레이스의 중년커플이 됨직하다. 휘적거리는 우리는 반지층의 오뎅바를 발견하곤 이 곳 보다 더 나은 곳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자그마한 가게였는데 운좋게 웨이팅 없이 들어간 마지막 팀이었고 메뉴판에 있던 가장 비싸지만 안 비싼 일품진로를 주문했다.


일품진로를 주문하면 2시간이 지나도 나가라고 안 할 줄 알았지.


비싸고도 안 비싸서인지 저녁 8시 30분에 칼같이 나와야만 했지만.


소개팅에 진저리가 나서 설치한 틴더였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가됐든 궁금한 것은 거기서 거기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정당하게 눈을 마주하고 떳떳하게 물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타인에게 무언가가 궁금하다면 비겁하게 뒤로 돌려 캐보는 것이 아니라 망설임 없이 물음표를 던질 태도는 되어 있어야 하니까.


어쨌든 프로토콜에서 성향에서 부터 이상형까지 필담을 해가며 꼼꼼히 체크해서 더는 물을 것이 없다고 믿었는데 그는 아니었는지 제법 소개팅다운 질문이 오고갔다. 대략은 이러했다. 결혼 생각 있어? 아이는? 나의 소개팅 히스토리를 풀어내다 본인의 집안은 제사인지 차례인지를 지낸다는 것도 고백했고 정점은 '이제는 나이도 있고 아무나 만나고 싶지는 않아.' 였다. 맞지, 틴더에 가입한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나 만나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근데 그 '아무나'가 그 '아무나'는 아니려나.


외줄타기라도 하 듯, 질문과 답변 시간이 이어졌다.


결혼 생각 있어?

없어, 좋은 사람 만나면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지만.

나도, 아이는?

너는?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없어.

나도 없어.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졌다.

결혼을 보채지 않을 사람.

결혼, 출산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더니 딱 그 모양새였다.


결혼은 왜 생각이 없냐는 말에 나는 구구절절 해졌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결혼 생각을 안 해봤는데 그냥 그게 자연스러웠다는 말을 시작으로 소개팅에 질려버린 이유까지 꼼꼼히도 말했다. 관심 - 호감 - 연애  혹은 사랑 - 결혼이라는 순서를 되도록이면 지키고 싶은 나와 만나자마자 결혼의 패를 들이미는 광속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꼭 체할 것 같아.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일품진로를 한 병 더 주문하려고 사장님께 신호를 보냈을 때 그와 나는 2시간을 꽉 채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느즈막히 고백하건대 그와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내기를 걸었다. 비가 오면 승리의 트로피를 거머쥐는 판이었는데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보란듯이 세찬 물줄기가 시멘트 바닥을 내리쳤다. 연남오뎅을 벗어나는 길은 분명 승리감에 취한 30대 여성의 위풍당당한 자태였는데 감당할 정도를 넘어선 가차없는 빗줄기에 스웨이드 재질의 메리제인 슈즈를 신은 나의 발을 폭삭 젖어버렸고 그 때 부터 내 마음도 퉁퉁 불어나기 시작했다.


도래하고 만 것이다.


그와의 만남을 여기서 마무리 해야할지,

바지가랑이를 부여잡고 한 번 더 타임 연장을 해야할지.


오롯이 모든 패를 까던지,

2차전의 승부사가 되기 위해 잠시 몸을 움추려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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