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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던 Aug 14. 2023

어쩌면 한 눈에 반했을까.

11월과 12월 사이, 둘.


비 냄새를 맡을 줄 아는 네가 좋아서,

"나 저녁 약속 취소해도 돼?"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나는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과 말들을 잔뜩 저질러버렸으니.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사실 내게는 2개의 약속이 더 있었다. 모두 이성과의 약속이었지만 오전에 잡혀있던 약속은 자연스럽게 파하게 됐고 저녁에 잡혀있던 약속은 내가 내 손으로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물론 이런 행동의 기저에는 예쁘게 손글씨를 쓸 줄 아는 그가 있었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에 긴 다리로 겅중겅중 뛰어서 화장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는 후다닥 자리로 돌아와 지금 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그가 있었다. 그날은 정말이지 다시없을 그런 날일지도 모르겠다.


나 저녁 약속 취소해도 돼?

응, 나랑 저녁 먹자. 뭐 먹을래?


화장실이 근심을 푸는 곳이라 했던가. 이 사람은 날 좋아하나.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나. 그런 고민들을 제치고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뱉은 말은 여과 없는 직진이었다. 이제와 말하건대 나는 그에게 큰 기대가 없었다. 만나자고 하니 만났을 뿐 금방 헤어지고 싶어질 것이라 생각해 만남을 3시간으로 제한했다. 위풍당당하게 '5시 반에 헤어지자.' 해놓고는 내가 먼저 달려 나간 셈이었다. 이런 걸 부정 출발이라고 하던가. 실격이라도 당할까 봐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었는지 그는 아직 모를 일이다.


여전히 망설이면, 여전히 주춤거리면 한걸음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주 오래 지속되었던 연애가 마무리된 지가 수년인데 그 사이 나는 용기가 조금 더 생겼나. 아니면 이 나이엔 여우처럼 살살 눈치를 살피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낫지 않나 했을지도.


충동적인 결정에도 속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고 눈을 맞추던 그가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저 저녁으로 무얼 먹을지가 중요하다는 듯 연희동 근처 맛집을 검색하는 모습에 너무 오랜만이라서 이 정도를 용기로 분류해도 괜찮은지 가늠도 안될 마음이 전혀 민망하지도 특별하지도 않게 여겨지는 것 같아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여기서 큰일이 나도 별 일이 아니겠구나 싶어서.


저녁 메뉴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떡볶이 었다. 홍대, 상수가 익숙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먹어봤을 김말이가 대표 메뉴인 그곳. 처음 만나서 김말이를 먹으러 간다고? 어쨌든 그와 나는 그런 게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금상첨화로 우리 둘은 김말이 애호가였다. 새벽에 문득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전자레인지에 냉동 김말이를 돌려먹을 정도로 말이다. 참으로 기회일 수밖에 없는 취향이 아닌가.


그를 만난 지 275일이 되어서야, 그가 떡볶이를 끼니로는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말이다.






'삭'으로 가자,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5분 거리였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혹시나 나의 발걸음이 뚝딱거릴까 봐 발랄한 척 어깨를 흔들었다. 힐끔힐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피는 건 취향의 외관을 마주하고 있다면 필연적 반응이었다. 촐랑촐랑 슬쩍슬쩍 그나마 그것도 샐쭉한 기분이 들어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비 냄새난다.

비가 다 끝난 냄새네.


결국 별 거 아닌 그 길이 별 게 되어버린 순간.


이 사람은 비 냄새에서도 시작과 끝을 골라낼 수 있는 사람인가 하며 빤히 얼굴을 올려다 보고는 금세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비 올 것 같은 냄새랑 비 다 내린 냄새랑 다르지? 지금은 끝난 냄새인데, 근데 비는 또 올 것 같아.

아닌데, 이거 다 그친 냄새인데. 내기할래? 소원 들어주기? 3차 내기!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재밌었는지 뭐가 재밌었는지 도통 알 수도 없었으면서 연희동 길거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어댔다. 만남에 걸어뒀던 제한시간이 무의미해졌다는 것 그리고 '삭'에서 나오더라도 한 번 더 그와 잔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거라는 사실에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팔랑팔랑 기쁨을 담아 걸었다.


사실 난 비의 시작과 끝 따위엔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

그와의 만남이 언제 금방 끝나버릴까 종종 거렸을 뿐.



포장마차 느낌이 물씬 나는 연희동 '삭'은 본 중에 가장 한적했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만난 지 고작 3시간 밖에 되지 않은 우리는 없을 리가 없는 어색함을 애써 웃음으로 내리눌렀다. 자리를 괜히 옮겼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눈을 마주치는데 온몸이 긴장했다. 괜스레 시선을 피해 바깥을 보며 조금이라도 빗줄기가 굵어지면 늦어질까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뒤적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지금 나가야 하는데. 아쉽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그저 한 번 웃어 보였고 잠깐 소강되는 빗줄기에 근거 없는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 나는 자연스레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고 아까 나갔어야 했다고 그러면 내가 이기는 건데 불퉁 거렸지만 사실은 그저 그와 마주 보고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어서 그 어떤 공기의 흐름도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대체 얼마만이었을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반질반질 치아를 내어놓고 배가 아프게 웃어본 적이.

3차 내기를 내 마음대로 소원 들어주기 내기로 착각할 만큼 정신 못 차리게 재미있었던 적이.


애석하게도 연희동 바삭을 벗어날 때쯤엔 비가 그쳤지만, 3차를 누가 계산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였는지, 그였는지.


좋아하지도 않는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눈을 떼지 못했던 나와 그런 나에게서 단 한순간도 눈빛을 거두지 않았던 그가 처음 만났던 연희동 한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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