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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산박 Sep 26. 2022

[북리뷰] 김훈 ‘하얼빈’

과연 나는 이 땅에 발붙이고 살 자격이 되는가?


김훈 작가를 좋아한다. 

특히,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것을 주밀(周密)하고 담백하게 표현하는 그의 특유의 문체를 만나면, 조심스럽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게 되고 거기에 비장한 느낌까지 든다. 그래서인가. 그의 역사 소설은 당대의 분위기만큼이나 어둡고 쓸쓸하며 외롭고 아프다. 역사를 잘 풀어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칼의 노래’에서 특히 그랬다. ‘하얼빈’에서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문장과 선택된 단어들은 임진년(1592년)의 ‘칼의 노래’와 300년이 지나 대한제국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됐던 1900년대 초가 서로 뒤바뀐 느낌이 들 정도로 ‘하얼빈’에서는 무겁게 다가왔다. 버려진 섬에 핀 꽃과, 빼앗긴 산하를 바라보며 인질처럼 도쿄로 향하는 대한제국의 열두 살짜리 황태자 이은(영친왕)은 시공(時空)과 그 모습은 다르되 같은 슬픈 조선이었다. 버려진 섬은 그래도 핏발 서린 장수의 눈동자 안에 있었지만, 후손들이 지켜내지 못한 제국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산하는 집요하게 유린했던 그들의 수중에 포박되어 있었다. 


안중근. 아명(兒名)은 ‘응칠’이다. 

내 기억과 지식 속의 그분은 ‘의사(義士)’였다. 교과서 속에서 검은 교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태극기에 약지가 반쯤 잘린 손바닥 혈서가 선명했던 애국지사. 그분의 이미지는 청년 안중근이라기보다는 중년의 모습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한일병탄(韓日竝呑)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거사(擧事)와 그 사건으로 여순(뤼순) 감옥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것 외에는 특별히 기억에서 없었다. 

김훈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안중근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감히 펜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 수십 년의 세월을 침묵으로 넘어오면서, 그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그것이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글의 경중에 따라 아마도 안중근이 품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기상이 조금이라도 폄하될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약지가 잘린 손바닥 혈서와 안중근 의사


포수, 무직, 담배팔이.

작가가 묘사하는 젊은 시절 안중근의 대명사다. 그 단어들은 오랜 시간 의사(義士)나 지사(志士)로 알아온 내게 안중근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렸고, 그분에게 형성된 애국의 원천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와 연결시키기에는 약간의 혼란스러움과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준 단어들. 그것들은 결말을 아는 독자들에게 예상 가능한 복선(伏線)으로 다가온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노루를 잡아온 안중근에게 숙부인 안태건은 이렇게 말한다.


- 몇 발로 잡았느냐?

- 한 발 쐈습니다.

- 아름다운 솜씨다. 짐승을 쏘기에는 아깝구나. (p.54)


소설은 메이지 시대 초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조선총독부 통감으로 파견되어 수렴청정하듯 대한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농촌에서 노루를 잡는 젊은 안중근을 번갈아 조명하면서 전개된다. 이토에겐 이미 기울어진 조선을 향한 일본제국의 음흉한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면, 한낱 농촌에서 노루를 잡는 응칠의 총구는 이미 그 음흉함의 근원을 저격하는 과녁을 향해 있었고, 절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단 한 발의 정확도를 쌓아가는 훈련이었다. 한편, 그들이 천황이라 부르는 메이지(明治) 앞에 왜 서 있는지 잘 모르는 열두 살짜리 소년 황태자의 모습. 그것이 바로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위상이었고, 외면할 수 없는 약자의 슬픈 현실이었다.


이토는 후임 소네에게 통감 자리를 넘기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 겉으로는 풍류 목적의 여행을 준비한다.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로 열차를 타고 다시 시모노세키에서 기선으로 대련에 도착한 후, 여순, 봉천, 장춘을 경유하여 하얼빈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그 길은 이토가 생각하기를 동양을 하나로 이어주는 길이었고, 일본제국이 대륙을 향해 원대한 꿈을 펼치는 통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주의 철도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고 그 욕망의 끝에서 운명적으로 안중근의 총구, 즉, 정렬된 조준선의 끝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안중근은 상해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름 있는 세도가들은 그를 돕지 않는다.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자 1905년 말에 다시 들어왔고, 고향의 친척들과 만나면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요사태의 소식을 들으며 들끓는 몸속의 소리에 분개한다. 그는 마음에서 이미 뜻을 결정하고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를 찾아가 간도(間島)로 가서 동포들과 국권회복을 도모하겠노라고 말한다. 말리는 신부를 뒤로 하고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해 서울로 가서 부산으로 내려가 다시 원산으로 그리고 러시아령으로 들어간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애초부터 조선에 와서 평화를 주창하는 서양의 신부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것은 안중근에게 추상적 평화였고, 민족이 짓밟힌 평화는 그에게 평화가 아니었다.


이토의 얼굴도 잘 모르는 안중근은 간도의 한인들로부터 이토의 인상과 그가 철도 시찰차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대동공보사에 들러 날짜 지난 신문에서 처음으로 이토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것은 숙명적인 만남이었다. 


‘신문 속 이토의 사진을 보면서 안중근은 조준점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손짓을 느꼈다.’ (p.97)


이토와 안중근의 하얼빈 만남은 서로 다른 동과 서의 루트에서 운명적으로 마주한 기막힌 만남이기도 했지만, 후에 그가 여순 감옥을 찾아온 빌렘 신부에게 고백했듯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하늘의 뜻이라고 했다. 물론 신부는 외면했지만, 거사의 과정 속에서 하나라도 틀어졌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의 빈틈없는 준비와 행운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는 연해주에서 함께 의병 생활을 했던 우덕순과 철저한 계획을 세운다. 하얼빈역은 안중근이, 혹시 이토가 전(前) 역인 채가구역에서 내리면 우덕순이 거사를 행하기로 약속한다. 그 운명의 10.26 전날의 안중근의 심리를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안중근은 총을 쥔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표적을 향해서 안중근은 조준선을 정렬했다. 눈동자, 가늠자, 가늠쇠로 이어지는 일직선 위에서 시선이 떨렸다.

그러므로 이토를 조준해서 쏠 때 이토를 조준해서 죽여야 한다는 절망감과 복받침, 그리고 표적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전쟁과 침탈과 학살과 기만의 그림자까지도 끊어버리고 둘째 마디의 적막과 평온을 허용해야 할 것이었다.’ (p.159-160)


하얼빈 거사


드디어 운명의 날 오전 9시, 안중근은 하얼빈 역사 구내로 들어가 이토의 환영 행사에 참여한 러시아 의장대 틈에서 열차에서 내리는 이토를 발견한다. 살아 있어 극도의 긴장감이 엄습할 테였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수없이 연습했던 조준선 정렬의 달인이었다. 이번엔 노루가 아닌 또 다른 짐승과 맞닥뜨린 민족의 포수였다. 단 한 발이면 족했다. 하지만,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본 후, 양 옆에 서 있던 일본인을 향해 몇 발을 더 쏜다.


‘키 큰 러시아인들 틈에 키가 작고 턱수염이 허연 노인이 서 있었다.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은 적막했다.’(p.166)


‘하얼빈은 적막했다.’

이 표현은 ‘칼의 노래’에서 셋째 아들 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종사관을 물리치고 하루 종일 방안에 있다가 저녁노을 진 염전의 소금창고로 가 가마니에 얼굴을 묻고 통곡했던 이순신을 생각나게 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고요’는 때론 시간의 정지와 사건의 무게를 가늠케도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찰나의 평화를 함의하기도 한다. 그렇다. 총성은 평화와 어울리지 않지만 평화를 향한, 평화를 위한, 약하고도 강한 민족의 염원이었다.


작가는 하얼빈 거사 이후의 모습을 책의 절반 정도 할애했다. 보통 소설 같으면 그냥 끝낼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거사 이후 안중근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던 말이 있었고 그것은 바로 재판 과정에 잘 드러나 있다. 거기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어린 황태자 이은, 마지막 황제 순종의 역사 인식과 책임감, 명동성당 대주교 뮈텔 신부의 종교관, 세계관, 제국주의의 보호를 받았던 친일 세도가와 입장이 난처해진 대소 신료들의 스탠스 등, 안중근은 국가보다도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그와 대척점에 있는 무리들과 온 세상을 향해 민족의 이름으로 크게 외치고 싶었고, 작가는 그 부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바로 이들이 바라본 안중근의 거사는 각각 자신들의 위치에 따라 달랐다는 점을 작가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리 없는 문자로 목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황태자는 어렸고 정략적으로 일본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구중궁궐 안에서 무능력하게 앉아 있는 마지막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가난을 온몸에 지고 여러 악조건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젊은 청년들과 대비가 되어 무심하게 느껴진다. 임진란의 선조와 이순신이 스쳐갔다.


‘조선 팔도는 고요했다. 순종은 그 고요의 바닥이 두려웠는데,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순종은 살길을 생각했다. 조선의 살길과 황실의 살길과 백성의 살길은 겹치고 또 부딪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중략) 살길은 저절로 떠올랐다. 순종은 메이지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다.

-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위로를 보냅니다.’ (p.170,171)


‘뮈텔은 무릎 꿇고 저녁 기도를 올렸다. 약육강식 하는 이 세계의 맨 앞에 서서 몸으로 세상을 끌고 나가던 이토의 고단한 영혼을 하느님께서 거두어 주시고…’ (p.175)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하였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 해도 더 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p.185)


‘마조부치는 밧줄에 묶인 안중근의 사진을 김아려에게 보여주었다.

- 봐라. 남편이 이처럼 체포되었다. 남편이 아닌가?

- 내 남편은 죽었다. 남편은 없다.

- 그대 남편은 안응칠이 틀림없다. 어떤가?

- 나는 모른다.’ (p.202)


-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 아닌가?

- 그렇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 (p.221)


안중근의 목소리는 숨소리처럼 들렸다. 옥리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목소리가 끊기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빌렘은 침묵 속에서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p.274)


여순 감옥에서 신문당하는 안중근 의사


안중근은 하얼빈에 시체를 묻어달라고 했지만 여순 감옥에 묻혔다. 나라가 독립이 되면 그 유해를 고국에 묻어달라고 했다. 독립이 되고 난 후에도 여순 감옥에서 그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작가도 말한다. 그의 대의(大義)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고. 그의 몸은 대의와 가난을 합쳐서 적의 정면으로 향했던 것인데, 그의 대의는 후세의 필생(筆生)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다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고…




아픈 몸을 치료받기 위해 전철 안에서 먼 길을 오가는 동안 책을 다 읽었다. 사람들의 출입과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목적지를 놓치지 않으려는 내 시선, 그리고 아픈 어깨를 주무르는 내 손길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가끔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훔쳐보며 주인공과 하나가 되도록 노력했다. 아픈 몸이 주인공 때문에 더 아팠지만 집에 왔을 때는 아프지 않았다. 남해안이 이순신의 바다였다면 간도는 안중근의 다른 바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관이 다르지만,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은 빌렘 주교의 마지막 만남에서였다. 신부는 겉으론 율법을 말했지만 안중근의 영혼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처자를 뒤로 하고 몸속에서 들끓는 민족의 한을 짊어지며 하얼빈으로 향하는 아직은 살 날이 많은 젊은 청년. 잘못된 일을 하지 않았다며 원흉의 심장을 쏜 후 도망하지 않았던 그의 기개. 황제부터 모두가 자신들의 살길을 찾아 대의고 책임이고 수치고 체면이고 다 던져버린 빼앗긴 강토에서, 자신의 안녕과 가족의 안위보다도 국가를 생각하며 민족을 생각했던 젊은 청년은 일제의 녹을 먹고 공명을 구가했던 군신과 세도가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쓸쓸히 형장의 이슬로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의 유언조차도 지켜지지 못한 채.


‘코레아 후라!’


이토를 저격한 후 그가 외친 첫마디였다. 

‘대한민국 만세’다.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학, 역사 곳곳에 숨어있는 친일(親日)과, 이 땅에 빌붙고 있으면서 선조들이 피 흘려 일궈놓은 터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폄훼하고 망언을 일삼는 무리들이 아직도 건재한 이상, 그분이 사지에서 외친 ‘코레아 후라’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공명될 뿐이다. 작가가 절반 이상 안중근의 거사 이후를 묘사한 것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슴을 치며 외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나는 이 땅에 발을 내딛고 살 수 있는 자격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면, 또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아직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다.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소리를 접하면서 앞날이 시계 제로(視界 Zero)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안중근의 뒷모습을 보며 뜨거운 마음이 올라오고 한없이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건, 나 또한 비록 큰 힘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선조들이 애써 가꾸어 놓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고 나는 그에 소속된 구성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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