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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산박 Oct 11. 2022

옛 경춘선 철길에서

경춘선 숲길을 걷다


가을이 점점 색을 바꾸어 갑니다.

오늘은 비가 아침부터 계속 옵니다. 늘 교회 갈 때마다 차창 밖 플라타너스 가로수 잎들을 바라봅니다. 아직 푸름을 유지하고 있는데 하나 둘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제 얼마 안 가서 엷게 빛바랜 낙엽들로 변한 잎사귀들이 거리를 온통 메우겠지요. 세월이 연출해 낸 세상은 한 치 오차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세월 한가운데 속해 있는 한 주를 보내며 마음에 올라오는 생각들을 정리해 봅니다.​

경춘선 숲길을 홀로 걸으며


휴일 오후나 거의 매일 저녁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한 시간 동안 빠른 걸음으로 걷기 운동을 합니다. 하루에 7 천보 이상, 많으면 만보까지 걷습니다. 거의 보름 이상 목디스크로 고생을 해서인지 건강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경춘선 기차가 다녔던 도심 속 그 길, 여전히 남아있는 레일이 추억의 길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마음은 상상 속에 빠져들어 갑니다. 소설의 소재라도 찾은 듯 혼자 이야기를 만들고 어느덧 춘천 가는 열차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입니다.



지금은 국내 유일의 특급 열차인 ITX 청춘 열차가 청량리역에서 춘천까지 다니고 있죠. 예전 경춘선의 후신입니다. 청춘이라는 이름은 젊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청량리-춘천'의 앞글자를 땄고, 춘천 여행이라는 낭만의 의미까지 있어 이름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학 다닐 때 예전의 그 낭만 열차를 몇 번 타고 다녔는데, 그때의 추억을 그리며 이제는 작은 숲길이 된 도심 속 레일 옆을 운동 삼아 걷습니다. 강아지들도 많이 나와 있고 간간히 연인들의 웃음소리도 들립니다.


밤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지만 고즈넉해서 좋습니다. 길을 밝히는 안내등 불빛이 경복궁 근정전 마당의 정이품, 정삼품 비석을 생각나게 합니다. 빠르게 걷다가 그 앞을 지나면서 임금이 된 기분으로 어깨를 뒤로 젖히며 보폭을 크게 합니다. 다리가 하늘로 치솟을 기세입니다. 헛기침을 크게 해 봅니다. 하늘로 치솟은 양쪽 플라타너스 가로수들도 유럽의 그것들처럼 너무 멋져 보입니다.



작은 터널길.

오래전 정선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레일바이크를 타고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레일 위를 달리는 기분은 정말 좋았습니다. 아우라지역 도착할 즈음 터널을 통과할 때 들려왔던 정선아리랑이 잠깐 동안 마음을 울렸는데 그때가 회상이 되고 작은 목소리로 함께 흥얼거리며 추억을 삼킵니다. 앞을 바라보니 지금은 잘 가지 않는 볼링장 레인이 떠오릅니다. 걸어가는 몇몇의 사람들이 남아있는 핀들처럼 보입니다. 픽 웃음이 올라옵니다.

​​


앗!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일월오악도가 여기까지 등장했군요. 창경궁의 명정전에서도 보았는데 이제는 대궐 안에만 거처하기가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임금과 왕후를 나타내는 해와 달, 그리고 오행을 상징한다는 다섯 봉우리 그리고 산, 소나무, 물 등은 영구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의 보호를 받아 자손만대 번영과 평화를 상징한다고 하죠. 빛이 함께 있으니 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꽃과 나비들도 담벼락 사이에서 놀고 있습니다.

왼쪽은 시간을 쪼개어 쓰는 바쁜 세상인데 오른쪽은 또 다른 세상입니다. 그 사이에 끼인 저는 자꾸만 오른편으로 눈이 갑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짝하기 싫고, 그 사이에 끼어 때론 마음이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불평에 빠지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제게 주신 시간들이 너무 복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길을 걷는 내내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밤이 색을 내면 가을은 붓끝을 단장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색을 모아 새벽이 가기 전에 호수에 풀어놓고 익은 세월을 덧입힐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가을 호수는 낮에 하얀 구름이 떨어지면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이 가을이 끝나가기 전에 얼른 호수에 채색된 그림 한 장을 받아 거실에 걸어놔야겠습니다. 아직 발걸음은 가을 소나타를 들으며 세월이 반질반질하게 만들어 밤빛이 길게 드리워진 레일 위에 있습니다.

경춘선 숲길, 참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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