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정엽 대만은 지금 Oct 05. 2021

감정쓰레기통이 자주 듣는 말, “너니까 이러지”

누구나 자신만의 감정쓰레기통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인간이기에 동물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감정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변기에 대소변을 보듯 자신의 감정을 쏟아버릴 수 있는 쓰레기통 말이다. 긍정적인 감정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난 7월 소녀시대 태연이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에 대해 언급했다. 태연은 일기장이 자신의 감정쓰레기통이라며 후련하게 갈겨쓰고 후련하게 청산한다고 했다. 그는 한 동안 안 썼던 일기를 다시 쓰게 된 동기에 대해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다며 “어쩔 수 없이 감정 쓰레기통이 필요해 일기를 썼다”고 말했다.


태연의 감정쓰레기통이 일기장이란 것을 본 나는 태연에 대해 참 건전한 사고를 지닌 연예인이란 생각을 했다. 일기라 함은 하루 동안의 기록이다. 어쩌면 그의 하루를 적은 기록이 나중에 역사에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는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어쩔 수 없이 종이 위에 토해내고 토 묻은 종이를 버렸다. 그 종이마저 아까워 스마트패드로 쓰고 지운다고 한다. 나로 하여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감정을 털어놓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풀고자 한 걸로 기억하는데, 태연의 이야기를 접한 뒤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내 감정쓰레기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 가까이 생각한 끝에 답이 나왔다.


바로, 글쓰기!


맥주 한 캔 놓고 속시원히 수다 떨 사람이 당장 내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몇 년 전처럼 답답한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붙잡고 한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속 시원하게 웃었던 때가 벌써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글을   있어서  행복한 놈이구나 싶다. 글을 쓰는 것이 습관이 들다 못해 이제는 강박으로 다가 온다.  쓰면 불안하기만 하다. 대만 이야기건,  감정이건, 당장 휴대폰을 들고  든지 마구마구 쓴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한다. 남들처럼 컴퓨터를 켜고, 커피  잔을 얖에 놓고 조밀조밀 글을   있는 호화로운 환경도 아니기에 그저 닥치는 대로 쓴다. 최단 시간에 생각을 정리해 풀어내려고 한다. 이렇게라도  하면 감정이 쌓여만  뿐만 아니라 우리말도 잊어버 있을 것만 같다. 발악일까?


태연이 내 동기를 유발한 덕분에  나로부터 출발하며 생각하게 된 감정쓰레기통에 대해 다방면으로 생각해 봤다. 사람들도 관찰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감정쓰레기통에 대해 내 감정쓰레기통인 글쓰기를 통해서 내 감정을 버리고 있다.


감정쓰레기통은 물건, 행동뿐만 아니라 사람도 될 수 있다. 그 사람은 ‘나’가 아닌 ‘타인’을 말한다. ‘타인을 감정 쓰레기통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여러분이 타인으로부터 감정쓰레기통 취급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 두 질문이 내게 있어 큰 화두가 됐다. 내 자신에게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봤다.


감정쓰레기통을 사람으로 삼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완전히 배제한 채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만 듣는 태도가 기저에 깔려 있다.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감정이 감정쓰레기통으로 취급당하는 이에게 버려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감정쓰레기통의 대상은 지인이나 가족이 될 수 있다. 특히 친하다고 느낄수록 이러한 성향을 보인다. 가족이니까 부모는 자식은 사로의 감정쓰레기통이 되는 일이 많다. 친구니까 친구를 감정쓰레기통을 삼거나 친구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다. 감정쓰레기통을 사람으로 삼는 사람들은 “네가 그러고도 친구나?”라는 식의 화법을 쓴다. 마치 술 잘 마시는 이가 술을 못 먹는 상대에게 술을 권하듯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상대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웃긴 건 이런 이들은 정작 상대방의 고민 따위에는 절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상대의 말 자체를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상대에게 감정을 버린 뒤 상대가 조언을 해주면 고마워하기는 커녕 귀담아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설사 들었다 해도 부정적으로 해석하거나 자신의 기대와 다른 답변이면 오히려 화를 낸다. 그리고 자기 할 말만 주야장천 한다. 수직적으로 보이는 관계에서 많이 나타나며 감정쓰레기통에 감정을 쏟는 이는 관계를 단 1도의 오차도 없이 90도로 만들어버리고자 한다.


누구나 사람에게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다. 다만 ‘도’가 지나치면, 즉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감정을 버린다면 이 사이에는 감정쓰레기통 문제가 존재할 수 없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상대에게 버린 감정의 양만큼 나도 상대가 내게 그 만한 양의 감정을 쏟을 수 있게 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감정쓰레기통을 사람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러한 단계까지 생각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다. 이들은 그저 상대가 자신의 생각을 다 알아주길 원하며 상대의 태도가 기대에 어긋날 경우 심지어 화를 내면서 불안 또는 초조함을 표출한다. 그리고 강요로 상대를 조종하려고 한다.


나는 감정쓰레기통을 사람으로 삼는 이들을 보면서 정신연령이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연령이 낮다는 증거는 없지만 유치함을 느껴서 그런 것 같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이유는 똥 묻은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를 겨 묻은 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주변을 살펴보면 남에게 의지하고픈 사람은 자기애가 강한 사람 즉 나르시시스트를 가깝게 두는 경우가 많다. 의지가 필요한 이들은 감정쓰레기통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고 나르시시스트는 감정을 부어버릴 수 있는 의존적인 사람을 이용한다. 그렇게 공생관계는 성립한다.


어떤 이들은 감정쓰레기통으로 취급하는 지인과 평소 불평이나 불만이 있을 때 말고는 연락을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감정쓰레기통인 지인은 자신의 불평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감정쓰레기통이 된 이들은 그나마 위안을 얻기도 한다. 감정쓰레기통이 된 사람은 그 지인이 감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며 그를 친구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황은 남녀 관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대만 매체는 여성이 자신의 감정쓰레기통을 남자로 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남자는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다면 그 여성이 본인에게 관심이 있든 없든 먼저 감정쓰레기통을 자처하고 나선다고 말이다. 어떤 대만 매체는 다른 가치를 여성의 마음에 심는 것이 중요하다며 감정쓰레기통으로 이용만 당하고 끝나지 않으려면 다른 가치를 키워서 여성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성에게 인식시켜야 한다고 했다. 대만에서 남자의 역할은 감정쓰레기통을 바탕으로 하나 보다 싶다. 사실, 이러한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다룰 수 있는지 여부에 관심을 쏟는다. 단순히 받아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감정적 가치는 이러한 여성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아니, 감정적 가치를 넘어 정신적 가치에 가깝지 않을까.


본인이 친구의 감정쓰레기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면 자신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내가 친구라고 믿은 사람에게 나는 감정쓰레기통의 가치밖에 주지 못했다고 말이다. 아니면, 감정쓰레기통 외에도 다른 가치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내가 그 친구의 감정쓰레기통이라서 화가 난다면, 이미 본인은 그 친구를 친구로 여기지 않고 본인을 피해자로 여긴다면 그 관계는 친구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감정쓰레기를 마구 나에게 쏟으며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친구라는 이름의 지인을 보며 나도 감정쓰레기통을 사람으로 삼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며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끝으로 이런 말의 의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니까 이러지!”


이 말의 속뜻은 “너한테 만큼은 조심하지 않을 테니 각오해”라는 의미가 아닐는지….

매거진의 이전글 아스퍼거 증후군 vs 일론 머스크 증후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