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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May 14. 2021

해변을 질주하는 하얀 말

내가 사랑한 것들 17

17. 해변을 질주하는 하얀 말 

    

지금도 그때의 하얀 말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나의 출발점은 어디였을까? 영상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의 나를 만든 출발점은 하얀 말을 만난 그때가 아니었을까 하고 가끔씩 나는 생각해본다. 

   

인생의 어떤  한 점에서 한 선택들이 모여서 우리의 운명을 만든다. 알고 보면 인생은 우연한 선택들의 묶음인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걸 점의 연결이라고 했다. 과거에 우리가 보았을 때 어떤 점이 미래의 어떤 점으로 연결될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면 그 점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온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는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문학을 공부해서 어떤 직업을 가져야지 하는 뚜렷한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철이 없었지만 그때는 그런 시대였고, 나는 그런 시대의 아우라 안에 놓여 있었다. 시를 좋아했고 문학을 좋아해서 국문과를 택했다. 막연하게나마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대학 시절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쓰고 싶은 글을 찾지 못했다. 졸업이 다가왔다. 무언가 직업을 찾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A 화재, B 건설 등 몇 군데 회사에 면접을 보았지만 가지 않았다. 샐러리맨으로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뭔가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 방송 피디였다. 그 즈음 글을 쓰는 것에 일종의 염증이 나 있기도 했지만, 글 쓰는 스트레스 없이 영상을 연출한다는 건 매력적인 일로 보였다.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한 것 외에 영상에 관해 완전히 문외한인 상태였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방송국이라고는 공영방송사인 KBS와 EBS뿐이었다. 나머지 방송사들은 학점 제한이 있어 학점이 좋지 못했던 나로서는 서류도 내볼 자격이 없었다. 함께 언론사 공부를 시작한 친구 둘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길로 가버렸다. 나는 혼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갔다. 겨울 초입 무렵,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EBS에 덜컥 합격이 되었다. 둘 중 하나, 50퍼센트의 확률을 통과한 것이다.      


입사하고보니 EBS는 우면동 외딴 골짜기에 있는 아주 작은 방송사였다.  지금 규모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 때였다. 인력, 장비, 스튜디오, 시설 등 모든 것이 열악했다. 교육 프로그램 외에 다큐멘터리 등 교양 프로그램도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 단계였다. 영화나 드라마를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실망이었다. 딱히 눈에 띄는 프로그램도 없었고, 어떤 걸 해야지 하는 뚜렷한 갈망도 없었다. 나 스스로 어떤 작품을 만들겠다, 어떤 연출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생각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내가 봐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젊은이였다. 나는 정신적으로 모호한 과도기에 서 있었다. 사회 비판적인 시선에 사로잡혀 있던 대학 4년을 보낸 터였다. 그런데 이제는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내가 있었다. 과거의 내가 내가 가야 할 길에 서 있는 나를 붙잡고 있었다. 비판은 쉽고, 만들기는 어렵다. 소매를 걷어부치고 달려들어 만들 자세가 되었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 과거의 유령에 붙잡혀 머뭇거리고 있었다.     


당시 EBS는 자체 제작보다 외화 편성이 많았는데, 바쁜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배정받은 입사 동기들과 달리 시간이 많았던 나는 자료실에서 BBC와 ZDF 등에서 만든 좋은 다큐멘터리를 매일 한 편씩 찾아보았다. 이게 엄청난 공부가 되었다. 그들이 만드는 방식은 영상에 과문한 내가 보아도 우리나라 방송에서 만드는 결과물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일년을 넘게 거의 매일 자료실을 찾은 걸 보면, 우리나라와 EBS에 그런 프로그램이 없었지만 언젠가는 그런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의식에서 스멀스멀 자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사이 입사 동기들은 모두 나를 앞질러 입봉(연출 데뷔)을 했다. 나는 그들보다 무려 2년에서 2년 반을 더 조연출 생활을 했다. 자연 다큐멘터리 조연출로 6개월, 청소년 드라마 조연출로 1년 반을 더 보냈다. 지나고 나니 이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입봉을 하고 나면 다른 영역에 대해 배우기는 어렵다. 장기기획 다큐멘터리를 경험하고 드라마를 배운 것은 장수로서 큰 무기 두 개를 얻은 것과 같았다. .늦은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결국, 나는 4년 반 만에 편성운영팀에서 입봉을 했다. 스테이션 브레이크(방송국 자체 광고)를 만드는 곳이었다. 피디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한직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오늘의 EBS 프로그램 소개’ 등을 형편없는 예산으로 만들고 있었으니 그럴 만하기도 했다. 막상 발령을 받고 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 우선 팀웍이 좋았다. 모두 젊었고, 그래서 혈기가 있었다. 부족한 상황을 탓하지 않고 아이디어를 짜내며 재미있는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한직의 장점은 말 그대로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국내외의 뛰어난 광고영상을 찾아보며 광고에 대해서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장기기획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에 더해 광고까지, 한 사람의 연출가가 경험하기 어려운 여러 영역의 점들이 연결된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점의 연결들이 내가 다른 피디들과 달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그렇게 1년 반의 세월이 지난 후, 드디어 운명의 점이 될 순간이 다가왔다. 그때는 그게 그런 순간이었음을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EBS가 교육부 소속으로 있다가 막 방송공사로 독립한 즈음이었다. 전 국민에게 알리는 광고가 필요했다. '그런 중차대한 일이니만큼' 우리 짠돌이 부장님은 온갖 생색을 내며 광고 제작에 거금 삼백만 원을 책정해주었다. 평균 50만 원 정도가 한편 제작비였으니 무려 6배나 증액을 해준 것이기는 했다. 이 엄청난 과제가 하필 원한 바 없는 나에게 떨어졌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퇴직하셨지만 지금이라도 만나면 물어보고 싶기는 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일의 배정상 내가 맡을 차례일 것이다. 아마도.    

 

프로젝트를 맡고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직접 만들기에 무리라는 생각이었다. 광고 전문회사에서 제작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나는 소개를 받아 생전 처음으로 광고회사를 찾아갔다. 논현동의 한 주택을 개조한 세련된 광고회사였다. 대표는 그 정도 광고는 적어도 3억 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했다. 상업적으로 제작되는 광고의 기본단가 정도였다. 3백만 원과 3억 원. 무려 백 배나 차이나는 금액이 아닌가? 나는 말도 꺼내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이제는 정말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는 온전한 내 몫이 되고 말았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저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오기가 올라왔다. 3억 원의 가치가 있는 일을 나는 3백만 원으로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13척의 배로 300척이 넘는 일본의 배를 상대해야 하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되었다. 3억원의 값어치가 있는 광고를 만들어보고 싶은 결기가 생겼다.      


정공법으로는 승부가 되지 않는다. 돈과 장비가 부족할 때 남는 것은 아이디어뿐이다. 작가와 조연출과 함께 치열한 브레인스토밍에 들어갔다. 캐치프레이즈는 무엇이 될까?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우리는 EBS가 새롭게 달려온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었다. 그동안 우리 팀 동료들은 곤충이나 개 등 사람만큼 돈이 들지 않는 모델을 써서 재미를 좀 보았었다. 우리도 사람 광고모델을 쓸 예산이 없으니 동물을 주인공으로 가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어떤 동물이 새롭게 달려온다는 이미지에 맞을까? 말이다. 푸른 해변을 배경으로 달려오는 눈부시게 하얀 말. 그 이미지만으로도 압도적인 광고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름이 돋을 만큼 멋진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말은 과연 우리 예산 안에서 빌릴 수 있긴 한 것인가? 

    

경기도 화성의 한 종마 목장을 소개받아 찾아갔다. 목장주는 사극 드라마 하루 출연료가 90만 원이라고 했다. 고삐와 안장도 없는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가 자유롭게 해변을 질주하는 장면을 촬영하겠노라고 하자 목장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말은 재갈이 풀리는 순간 야생의 본능이 살아난다. 말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 내 생각대로 하려면 조련사가 탄 선두마가 길잡이를 해야 하고 조련사가 탄 후발마가 뒤에서 이탈하지 않게 잡아줘야 그나마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순식간에 말 한 마리가 말 세 마리와 조련사 두 명으로 늘었다. 게다가 내가 생각한 촬영지가 안면도의 해변이었기 때문에 말들을 이동용 트럭에 싣고 가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내 제작비는 이미 초과하고도 남을 터였다.      


나는 언변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눌변 쪽이 더 가까울 것이다. 말로는 목장주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짧은 광고영상에서 그 목장을 광고해줄 수도 없기에 내가 가진 무기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그동안의 기획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나에겐 절박한 간절함과 그 마음을 담은 진실한 눈이 있을 뿐이었다. 말로는 다 하지 못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목장주를 바라보았다. 그런 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그분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방송국에서 왔다는 젊은 청년이 측은해서 그랬을까. 그는 그 모든 비용을 백만 원에 허락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 어렵지만, 그 시대에는 그런 낭만이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안면도 촬영일이 다가왔다. 하필 전국에 구제역이 생겨 방역망을 통과하며 어렵게 안면도에 도착했다. 촬영을 앞둔 날 저녁 나는 꽃지 해변의 여관에서 어두워지는 바다까지 잠 못 이루며 서성였다. 피디로서 처음 해보는 규모가 큰 촬영이었다. 온갖 생각이 머리 속을 파고 들어왔다. 나는 무사히 촬영을 끝낼 수 있기만을 빌었다.    


그날이 진정한 고난의 날이 될 거라고는 그날 아침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지없이 청명한 하늘이 순조로운 하루를 예감하게 했다. 안면도 꽃지 해변. 모래 해변이 딱딱해서 차로 달리며 촬영할 수 있는 곳이다. 방송국에 한 대 있는 스테디 캠과 500mm 망원렌즈, 어렵게 빌린 지미집 크레인 등 나는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고급장비를 챙겨왔었다. 준비해 둔 콘티대로 이 장비들을 사용해 촬영한다면 누구도 보지 못한 멋진 영상이 나오리라.       


호쾌하게 첫 레디 액션을 불렀다. 선두마를 따라 눈부시게 하얀 말이 해변을 질주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짙푸른 수평선을 배경으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 모래를 날리며 달리는 하얀 야생의 말. 과연 최고의 영상이 나올 만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나는 성공을 예감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성공은 그렇게 쉽게 오는 법이 아니다. 재갈이 풀린 말은 카메라 렌즈를 벗어나자마자 해변을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마늘밭에서 말을 찾아오기까지 두 시간의 피 같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두 번째 테이크. 질주하던 말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침 일찍 시작한 촬영은 겨우 두 컷을 촬영하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하루 밖에 없는 일정. 벌써 절반이 날라가버렸다. 

    

점심을 먹는 둥 둥 마는 둥 하고 오후 촬영을 속개했다. 이번엔 자동차에 스테디캠을 매달고 말 옆을 따라가며 촬영했다. 또 다시 카메라를 피해 달아난 말은 이번엔 깊은 개펄에 빠지고 말았다.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치다가 말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귀한 말인데 부상을 입으면 어쩌나? 부상을 입고 절룩이면 촬영은 어찌하나? 속이 타들어가는데, 타이밍도 절묘하게 마침 그때 촬영을 구경하러 목장주가 왔다.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상처를 치료하고 어찌어찌 다시 촬영을 시작했지만 지친 말은 더는 뛰려고 하지 않았다. 조련사들이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동물이 어찌 내 맘 같을까? 아직 촬영할 컷은 너무 많이 남았다. 거기다 조수가 바뀌고 있었다. 3시가 지나자, 크레인 기사가 썰물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크레인 촬영은 더 늦출 수가 없다고 경고했다. 크레인이 물에 잠기면 빼낼 수가 없다. 진퇴양난.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움직이지 않는 말. 밀려오는 조수. 바닷속으로 빠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망감에 든 그 생각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살렸다. 빠지는 것이 내가 아니라 말이라면! 차라리 말을 바닷속으로 넣어버리자. 그러면 말은 해변 쪽으로 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과연 바다로 밀어 넣은 말은 해변으로 왔다. 지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진 못했지만 다른 쪽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해변을 향해 달려왔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어쨌든 촬영은 가능하지 않은가? 조수가 밀려들어 촬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우리는 촬영을 계속했다. 어느새 붉은 노을이 수평선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촬영은 끝이 났다. 촬영을 정리하며 어두워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30초짜리 광고가 연출가로서 내 인생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 모든 고난에 값할 만한 멋진 영상이 나왔다. 고통은 썼지만 열매는 달았다. 경영진과 모든 선후배들이 좋아했던 그 광고는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EBS를 통해 방송되었다. 그리고 ‘듣보잡’이었던 내가 다음의 큰 작품을 하게 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일련의 경험은 나를 가르쳤고 성장시켰고 또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뒤로 나는 몇 번이나 그때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났고 또 이겨낼 수 있었다. 그때 내가 그런 도전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운명의 선택을 할 때가 온다. 그 한 지점에서 내리는 선택들이 하나하나 모여 우리의 운명을 만든다. 아무리 사소한 점일지라도 그것을 작게 또는 크게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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