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썬>
영화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길래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긴 시간 동안 나를 울고 웃고 만드는가. 지난 세 달 내내 나를 찌른 질문이다. 도저히 답을 알 수가 없어 영화를 보고 또 봤다. 성남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서 경복궁역에 있는 영화관에 일주일에 세 번씩 갔다. 용돈의 대부분을 영화에 썼다. 밥을 굶고, 옷을 못 사도 영화는 꼭 봐야 했다. 무언가에 이렇게 빠져보긴 처음이었다. 물론 순전히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영화관을 찾은 건 아니었다. 다른 영화관은 싫었다. 항상 가는 영화관 밑 카페에 앉아있으면 들리는 내 취향의 음악과 예술인 포스를 풍기는 사람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도 그런 문화에 속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옷과 바람의 음악을 듣고,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러 매주 영화관에 오는 사람들. 나도 '그런 사람'에 포함되었으면 했다. 영화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과 예술인들을 향한 동경. 이 두 마음이 나를 매주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세 달 내내 나를 찔렀던 질문들은 <애프터썬>에서 비롯되었다. <애프터썬> 이후 나는 세상을 영화로 본다. 삶을 하나의 거대한 장편 영화로 보기 시작했다. 영화와 삶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대부분 영화가 삶의 순간을 인용하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삶이 영화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영화 같은 순간이 있다. <애프터썬>의 마지막에서 퀸의 'Under pressure'와 함께 캘럼과 소피의 댄스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다. 영화에 속해있는 한 장면이므로 분명히 영화다. 그러나 동시에 삶이기도 하다. 깜빡이는 화면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내가 보는 세상 같다. 나는 가끔 사람이 아주 많은 곳에서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한다. 많은 인파 속에 섞여있을 때면 내가 사라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한다. <애프터썬> 이후 나는 자주 삶과 영화를 구분할 수 없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만큼 영화관에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게 내 삶의 방식이다.
태극권의 핵심은 코어다. 목이나 어깨같은 다른 외부근육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코어 근육에만 힘을 준다. 코어 근육에 힘을 줬다면 그 다음 동작들의 디테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몸에 맡기면 된다. 태극권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캘럼'은 분명히 자유로웠을 것이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지겨운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넓디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 태극권을 하는 '캘럼'과 '소피'가 참 작아보였다. 멀리서 보면 우리의 삶도 그다지 크지 않다. 그때는 나를 잡아먹었던 감정들이 지금 와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애프터썬>을 처음 봤을 땐 그저 색감이 이쁜 영화라고 생각했다. 두 번 봤을 땐 슬퍼서 울었다. 돌아갈 수 없는 기억에 갇혀 있는 소피가 외로워 보였다. 세 번 봤을 땐 마침내, 영화란 무엇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최초의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같다. <애프터썬>은 나의 시작이자 최초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