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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Jun 06. 2021

복싱장에서 운동화 가져오기

생각보다 힘들다구요


새로운 매거진을 계획하고 첫 글을 발행하며.. 조금 더 거창한 도전에 대해 적을 수도 있을 테지만 굳이 첫 시작을 복싱장에서 운동화 가져오기 같은, 사람에 따라 그냥 아! 나 헬스장에 물건 두고 왔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별 일 아니라는 듯 헬스장에 가서 대충 물건 챙겨 오면 그만일 그런 별 것도 아닌 것을 도전이랍시고 적는 이유는 이게 나에게는 별 것이기 때문이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주 5회 복싱장에 가서 회사에서 싫어하는 인간과 맞짱 뜨는 생각을 하며 죽어라고 샌드백을 줘팼다. 복싱장 관장님이 권장하는 샌드백 패기 라운드 횟수는 3-5번이었는데 나는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혹은 그 인간이 유난히 꼴 보기 싫은 그런 날이면 7라운드가 넘게 샌드백이 마치 그 인간인 양, 이미 지쳐버린 팔 근육이 더 이상은 못 팬다며 나도 모르게 오른손이 왼손의 글러브를 벗기려 할 때조차 내가 안 패면 도리어 맞는다며 꾸역꾸역 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땡- 벨소리가 들릴 때까지 죽어라고 팼다.


그날은, 내가 마지막으로 복싱장에 나간 날은 솔직히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샌드백에 무슨 원수라도 진 듯 또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하며 샌드백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라도 졌을까 싶도록 패고 온 날이었다. 3개월 회원권 결제를 했었고 아마도 결제일이 가까워진 시점이었다. 당연히 내일이나 내일모레 또 가서 샌드백 줘 패고 와야지 하며 복싱장을 나섰다. 락커에 샴푸, 린스, 바디워시, 바디로션, 수분크림, 머리끈을, 공용 락커엔 글러브를, 신발장엔 운동화를 두고. 그날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은, 아니, 나는 아직도 언젠가는 다시 복싱장에 갈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부적합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어쨌건 지금 시점에서 기록하자면 그날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손톱의 때만큼도 하지 못한 채 복싱장을 나섰다. 그리고는 내 인생에 아마도 처음으로 9시부터 6시까지 사무직 근무를 약 3달간 하게 되었고, 회원들이 붐비는 것을 기피해 복싱장이 문을 열자마자 일찍 혹은 한가한 점심시간에만 복싱장에 갔던 나는 당연하게도 보나 마나 퇴근한 직장인들로, 학원 마친 중고등학생들로, 중간고사 끝난 대학생들로 가득 찼을 것이 분명한, 보나 마나 샌드백을 7라운드씩 패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내 차례를 걸고 한 15분 정도 기다렸다가 감질맛나게 기껏해야 3라운드만 패야할 것이 분명한 저녁시간에 운동을 하러 가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처음엔 곧 다시 갈 건데 굳이 락커를 비워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회원권 갱신일이 지나버렸고, 그리하여 나는 아무런 권리도 없이 복싱장의 락커 한켠, 아니 공용 락커까지 치자면 여러켠을 점령 중인 셈이었는데 그게 나는 찜찜했다. 그래서 그냥 여느 날과 다름없이 운동하러 가는 것처럼 복싱장에 가서 내 개인락커 안의 세면도구들을 챙기며 잠깐 쉬는 것도 좋죠 하는 관장님의 말에 네, 회사 때문에요 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고 그 후 수많은 변명과 핑계들이 쌓여 1년이 지났다. 그날 챙겨 온 샴푸와 린스는 이미 다 쓰고 재활용까지 해서 버린 지 오래지만 내 운동화와 글러브는 아직도 복싱장에 있는 상태. 아주 가끔 관장님과 문자로 안부를 물으며 회원권이 끝나고도 한참 나오지 않는 회원들의 운동화를 주기적으로 내다 버리는 관장님에게 내 운동화는 아직 안녕한지도 물어왔기에 아직은 운동화가 복싱장 입구 신발장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날은 친구들과 펍에 가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타고 멀리 나가는 외출이 오랜만이라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이 됐다. 이옷 저옷 입었다 벗었다 끝에 고른 옷은 검정색 탑과 치마. 이제 신발을 고를 차례였다. 사실 스틸레토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힐을 신고 대중교통을 타기는 무리라고 생각되어 무난히 운동화를 신기로 했다. 나는 운동화가 그다지 많지 않다. 기껏해야 3켤레? 마젠타색 스니커즈까지 포함하면 4켤레쯤 되나 보다. 그런데 마젠타색 스니커즈도 그렇고 나머지 스니커즈들도 다 아이보리색 아님 밝은 회색이다. 검정색 상하의와 그닥 어울리지 않았다. 딱 하나 검정색 운동화가 있긴 한데. 문제는 그게 복싱장 신발장 맨 위칸에 고이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어떡하지. 펍 한 번 가자고 운동화를 가져와야 하나. 운동화까지 가져와버리면 영원히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느낌인데. 아 정말 어떡하지. 펍에 가기 하루 전, 그 하루를 꼬박 고민했다. 운동화를 가져오느냐 아니면 코디를 싹 바꾸느냐. 지금 같으면 그냥 샌들 신을 텐데 그때는 샌들을 신기엔 조금 추웠다. 어떡하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복싱장에 운동화 가지러 가는 꿈까지 꿨다. 마지막으로 복싱장을 나설 때 신발장 맨 위칸에 운동화를 뒀던 것 같은데 그게 정확한 기억인지 확신이 없어 꿈속에서 나는 복싱장에 가긴 갔는데 운동화를 찾지 못해 다른 회원들을 코칭해주어야 하는 바쁜 관장님까지 나서서 내 운동화를 찾아주었고 곧 다시 올게요 하는 아무도 안 믿을 헛소리를 해가며 뻘줌히 복싱장에서 빠져나왔다.


꿈까지 꾸다니. 그런데 오히려 꿈을 꾸고 나니 차라리 복싱장에 가는 게 한결 덜 부담스러워졌다. 이미 한 번 경험을 한 듯했달까. 뭐, 나 같이 운동화 가지러 온 회원이 그동안 한 둘이었겠어. 뭐, 이렇게 열심히 샌드백 치러 나오는 여자 회원은 처음이라고 관장님이 나 많이 자랑스러워하셨는데. 뭐, 영영 다시 안 갈 건 아니니까. 그래서, 그냥 뭐. 꿈에서 깬 지 2시간, 더 지나면 마음이 바뀔까 봐 에라 모르겠다 하며 복싱장으로 향했다. 검정색 나이키 운동화. 내가 기억한 그 자리, 신발장 맨 위칸 전문 복싱화 옆에 마치 어제 두고 간 듯 놓여 있던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복싱장 입구에는 회원들이 오갈 때마다 센서로 감지해 딩동 하고 울리는 벨이 있는데 벨만 울리고 사람이 들어오지 않으니 코치 한 명이 입구로 나왔고 운동화를 집어 든 나를 발견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하길래 아, 운동화 가지러요 하고 머쓱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운동화를 찾고 난 뒤 안에 들어가 관장님에게 인사도 하고 갈 요량이어서 관장님은 계세요? 하고 물었다. 운동 열심히 한다고 글러브까지 선물로 주셨는데 이렇게 운동화나 챙겨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다니. 그다지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는 하고 가야지 싶었다. 그런데 웬걸, 꿈에서 회원 코칭도 마다하고 내 운동화를 같이 찾아주셨던 관장님은 급성 간염으로 입원 중이시란다. 얼굴을 못 뵙고 가서 아쉬운 한편 얼른 쾌차하시기를 바라며 복싱장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운동화만 챙겨가세요? 하고 코치가 묻는다. 음, 글러브는 펍에 가는 데 하등 필요가 없기도 하고, 내 이름 석자 쓰여진 글러브가 복싱장에 남아 있다는 사실로 언젠가 나는 다시 복싱장 회원권을 갱신하러 가지 않을까. 그러니까 뭐, 운동화만 챙겨가는 게 좋겠다. 네 오늘은 운동화만요!


이게 뭐라고 그렇게 고민을 하고 꿈까지 꿨을까. 운동화를 양 손에 한 짝 씩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는 듯 집에 돌아왔다. 동생은 이게 어째서 도전이냐고 했지만, 고심 끝에 꿈에까지 나온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도전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크게 인간은 두 분류로 나뉜다. 헬스장에 신발을 두고 간 뒤 찾으러 가는 사람과 영원히 찾지 않는 사람. 혹여 헬스장에 두고 온 신발이 눈에 아른거리는 독자가 있다면 이참에 한 번 용기를 내 보시길. 남들의 눈에 당신은 그저 헬스장에 두고 간 신발을 찾으러 온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가져온 운동화를 신고 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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