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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Jan 25. 2023

많이 울고, 많이 웃게 해준 너에게.

- 이수지 그림책 「강이」를 읽으며.


어린이 도서관 사서가 되고 나서 정말 다양한 그림책들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드는 책들은 대부분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담긴 그림책들이었다. 맏이인 나는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부모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다. 운동장의 느릿느릿한 개미들을 구경하고 운동장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구경하며 변화하는 하늘의 색을 감상하는일부터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는 걸 관찰하는 일은 늘 내 하루의 일과였다.


그래서 나의 모든 시간과 마음을 다하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다 보면 현관문이 열릴 거야. 내가 눈을 감았다 뜨면 짜잔! 하고 앞에 있을 거야.' 부모님이 들어오실 그 문 앞에서 부모님이 들어오는 상상을 하면서 주문을 외웠다.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엄마의 소리인지 아빠의 소리인지 알았다. 그리곤 문 입구에 서서 문을 여는 아빠와 엄마에게 안기는 게 와-락 안기는 게 그렇게나 좋았다.


서른이 넘은 지금도, 어린 시절에 느끼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세포 하나 하나에 기억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 어른이 되어서 가끔 만나는 이런 '강이' 같은 그림책들은 어린이였을 적 나의 감정을 더 세밀하게 떠올리게 해준다.



2023년 새해가 밝고, 알사탕이 도서관에 반납하던 그림책 더미들 속, 그림책 한 권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눈꺼풀이 슬프게 내려앉은 강이의 얼굴. 책을 받아들고 강이의 표지 속 강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의 눈꺼풀에 드리워진 외로움이 흡사 어린 시절 느꼈던 그 감정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외로운 어린이였다. 어른이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나를 감싸고 있던 여러 감정들 중에 늘 압도적이었던 것은. 외로움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사랑받지 못하는 어린이였는가?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니다. 내 내면의 긍정적인 부분과 밝은 부분들은 대부분 내가 받은 사랑들에서 비롯된 것이라 늘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도 어른만큼 꽤나,
또한 곧잘, 외로움에 빠지곤 한다.

어린이도 스스로의 외로움을 해결할 줄 안다. 나의 경우에는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부터 자발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어린이가 스스로 일기를 쓰면서 자신을 다독이며 외로움과 마주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가장 직관적으로 쉽게 외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이었다. 부모님 다음으로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들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반려동물이었다. 그 작고 부드러운 솜뭉치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있다 보면 이유 모를 외로움은 금방 잊히곤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정말 많은 반려동물들을 키웠다. 내 성장 과정의 대부분의 좋은 추억들은 늘 그들과 함께 했다. 할머니 집에서 키운 시골 개들과 토끼들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는 병아리가 닭이 될 때까지, 거북이는 방사를 해줄 때까지 키웠다. 물론 그 닭은 가족의 식사가 되며 온 집안을 내 울음바다로 만들었고, 거북이 방사는 생태계를 위협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고 나서 알았지만 말이다.


그런 아름다웠던 기억들 속 유일하게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반려견이 있다. 아빠가 이름을 지어 줬던 '강산'이다. 그림책 속의 강이를 보니 자연스럽게, 강산이가 떠올랐다. 강아지인 강산이를 집으로 데려온 어느 날 아빠는 강산이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슬기로운 금수 강산의 '강산'이라고 짓자!
어때 완전 우리 가족한테 딱이지??

나의 이름 '슬기', 남동생의 이름 '금수'를 따서 만든 문장을 설레는 소년처럼 이야기하며, 아빠는 마치 또 하나의 형제가 생긴 마냥 어린 강아지의 이름을 강산이라고 지었다. 어린 나는 '참 촌스럽다'라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 나에겐 우리 집 강아지의 이름을 짓는 권한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눈치도 빠르고 똑똑하고 집에 돌아오면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들며 날아갈 듯이 세상 누구보다 반겨주는 강산이가 좋았다.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무엇인가를 '키운다'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는 사실도 배우게 되었다. 목욕도 시켜줘야 하고, 발톱도 깎아줘야 하고, 산책도 시켜줘야 하고 초등학생 저학년에 불과했던 나에겐 꽤나 많고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나는 동물을 어떻게 훈련시켜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매번 배변 훈련은 엉망. 집안은 (엄마 표현으로) 늘 귀신 소굴 같았고, 내가 나름대로 치운다고 애를 써도 수습이 되지는 않았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의 손을 벗어나 어린이가 키우는 강아지가 집안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하아.. 읽는 이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와 남동생의 육아를 도맡아 하던 엄마는 결국 강산이 때문에 폭발했고. 자연스럽게 강산이는 아빠가 일하는 부산 외곽의 옻칠공방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 이후 몇 주간은 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동생과 나를 반기는 강산이가 보이는 듯했고 왈왈 짖는 강산이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의 공방은 동생과 나의 놀이터였고 집이 있는 도시보다 자연에서 강산이와 뛰어노는 편이 훨씬 재미있었으니까.


주말이면 동생과 나는 늘 강산이를 보러 아빠의 공방으로 놀러 갔고, 우리가 공방 근처로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멀리 강산이가 왕왕 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른이 된 지금은 강산이의 생김새도 강산이와의 추억도 모두 희미해져 기억에 남는 건 크게 없다. 그저 다른 날과 똑같은 어느 날 강산이를 만나러 달려갔을 때 강산이가 늘 있던 자리에 강산이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그냥 강산이가 집을 나간 거 같다"라고만 말할 뿐 강산이를 찾아 나서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고, 엄마에게 나의 울음이 화가 될 때까지 그저 엉엉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발 좀 그만 울어라."라는 엄마의 짜증 섞인 말에 겁을 먹고, 억지로 울음을 참아내었던 게 강산이에 대한 마지막 추억이다.


이제는 엄마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많은 대화를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 좋은 점들 중 하나다. 부모님이 세상의 전부였던 힘이 없는 어린이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어린 나를 키우던 부모님의 나이를 가지게 되면서, 부모님과 나누는 대화들의 폭은 이전에 비해서 훨씬 넓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던 중 엄마에게 어린 시절 키웠던 강산이의 이야기를 얼마 전 물어보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내가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리 강산이는 집에 가는 동생과 나를 따라서 나오다가 차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어린 우리가 충격을 받을까 봐 어른들은 그저 지나가듯 둘러대었다고. 강산이에 대한 많은 기억이 희미해진 다음 들은 강산이의 마지막 모습은, 그냥 말을 잊게 만들었다. 기억이 그리 남지 않아 슬픈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외롭게 남은 강산이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수지 그림책 《강이》는, 사람들 마음속의 강이를 생각나게 해주는 책이다. 그림책 모임을 하면서 함께 이 책을 읽었을 때 어린 시절 키웠던 반려동물을 떠올리고 이야기하며 우는 멤버들이 많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다들 기억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조건 없이 받았던 그 사랑의 기억들을 말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따스한 체온을 느끼고 싶을 때마다 나도 고양이 한 마리 키워볼까. 나도 강아지 한 마리 키워볼까. 이런 생각을 참 수도 없이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린 결론은 나의 외로움 때문에 반려동물을 외롭게 만드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어린이였을 때 보다 지금은 외로움을 다루는 훈련이 잘 되어있으니, 나의 외로움 하나 달래려고 반려동물을 외롭게 만들 수는 없다. 함께 키워줄 수 있는 가족이 생기고 지금보다는 좀 더 집에 있을 시간이 많아졌을 때, 그때 반려동물을 입양하자.라고 마음먹었다. 그림책 속 쓸쓸한 강이의 뒷모습을 현실에서도 보고 싶진 않으니 말이다.







첫눈처럼 왔던 나의 강산아.

참,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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