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 방약무인(傍若無人) 한 손님>
폭우 뒤끝의 더위 속에서 넘치는 의무감으로 오늘 치 걷기운동을 마쳤다. 핸드폰 속의 만보계는 6280보를 나타낸다.
스타벅스에 들어섰다. 오늘은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아닌 다른 음료를 마시고 싶다. 메뉴판이 필요하다. 아주 오랜만에 계산대 뒤 벽의 메뉴판을 보았다. 메뉴를 표시하는 화면이 수시로 바뀐다. 요즘은 메뉴 전체를 한꺼번에 써놓지 않는 모양이다. 종류별로 메뉴가 순차적으로 표시된다. 예를 들어 커피 카테고리를 한번 놓치면 상당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세상은 또 바뀌어 있었다. 나는 신 메뉴로 짐작되는 음료로 결정을 했다.
어라.
내가 ‘신문물’에 놀라고 있는 사이 내 앞에 두 명의 여성이 들어섰다. 뒷모습으로 짐작컨대 나보다 연배가 몇 년은 위 일 것 같다. 나는 그 손님들 뒤에서 멀뚱거리며 서 있었다. 두 손님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주문 담당 직원에게 무언가를 묻는다. 질문 후에 또다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눈다.
이쯤 되면 뒤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한번쯤 돌아볼 법 한데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정말 말 그대로 방약무인(傍若無人-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뜻.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의 경지다. 졸지에 그림자가 되어버린 나는 다시 멀거니 서 있을 수밖에. 나는 속으로 ‘그러다가 만약 아아 주문하면 화 낼 거야(혼자 속으로 하는 말이니 반말이라도 이해하시길)’ 하고 말을 삼켰다. 아직도 결정을 안 했는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두 손님, 마침내 키 작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구요” ‘아악~~~~’. 다행히 다른 메뉴는 아아가 아니었다.
그림자 인간인 나는 주문을 마치고 걸어가는 두 여성에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우리 쑥 크림 프라푸치노요.(이게 메뉴 하나의 이름이다)”
오늘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나는 왜 이제까지 라떼는 모두 남성이라고 생각했을까.
<장면 #2 : 키오스크 사용할 줄 아세요?>
부부인 듯한 남녀가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선다. 남자의 머리가 센 정도로 보아 60대 초반 쯤일까. 2층에 올라갔다 내려온 남성, 계산대 앞에서 두리번거린다. 계산대 바로 앞에 있는 파일 인쇄물을 뒤적이기도 한다(알고보니 이건 알레르기에 관한 안내물이었다).
알바생으로 짐작되는 젊은 여성.
“메뉴 찾으세요? 메뉴가 따로 없으셔서(**), 저쪽... ” 하면서 입구쪽을 가리킨다. 그 카페에는 아예 메뉴판이 없다. 계산대 뒤 벽에도, 계산대 앞에 인쇄물로 된 것도 아무것도 없다.
출입문 바로 옆에는 키오스크가 한 대 있다. 남성(이 남성은 물론 신데렐로다)이 물었다. “주문도 키오스크로 해요?”
“카드로 하실 수 있으시면 하시면 되는데, 힘드시면... 도와드릴게요.”
따지는 게 몸에 밴 나는 속으로 ‘뭐가 힘들고, 무얼 도와준다는 걸까’하고 생각한다. 내 머릿 속에는 이 브런치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햄버거 가게와 몇몇 식당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했던 화려한(!) 이력과 마트의 자동계산기를 사용했던 경험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힘드시면 도와드릴 준비가 돼 있던 친절한 알바생이 내 주문번호를 부른다.
아내가 마실 아메리카노와 내 음료가 나왔다. 내 음료는 얼음을 넣고 블렌더에 간 음료다. 커피 용 스트로만 주길래 물었다. “굵은 스트로는 어딨어요?” “조기요.” 나는 종이에 싸여서 눈에 안 띄던 굵은 스트로를 챙겼다.
여유있게 키오스크로 주문을 마치고, 내 음료용 스트로까지 챙긴 나는 저 알바생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지 궁금했다. 키오스크에 당황해 하며 버벅이는 라떼??
<장면 #3 : 청소년, 라떼에게 키오스크 사용법을 묻다>
나는 마트에 장보러 갈 때마다 거의 매번 마트 1층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 가게에는 키오스크가 일찌감치 자리잡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키오스크로 주문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문을 마친 내가 모니터에 번호가 뜨기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는데.
세 대의 키오스크 가운데 나에게 가장 가까운 쪽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던 중학생 쯤 되는 청소년이 뒤를 돌아본다. 뒤에는 알머니(=아주머니+할머니)가 서 있다. 중학생은 화면을 가리키며 뭐라뭐라 한다. 알머니가 함께 화면을 보면서 뭐라뭐라 한다. 같은 모습이 한번 더 반복된다. 주문과 계산을 끝낸 청소년은 알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아주 오래 전 첫 직장 입사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만약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그렇다면 내가 방금 본 저 광경은 뉴스다. 알머니가 손주뻘되는 학생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상황 말이다. 뭔가를 규정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한 마디 하겠다.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니까 못 하는 것이다.’
*자화상(自畵像) : 표준국어 대사전에서는 ‘스스로 그린 자기의 초상화.’라고 나온다. 뜻이야 물론 알겠지만,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나무위키에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그린 그림’이라고 풀었다. 길지만, 후자가 쉽다. 그렇다면 타화상(他畵像)은? 신데렐로가 만든 조어(造語)다. 뜻이야 다 아실 터.
**메뉴가 '없으셔서' ; 이걸 메뉴에 대한 의인법으로 이해해야 하나, 어쩌나. 압존법을 들먹이면 그게 뭐냐고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