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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데렐로 Aug 22. 2022

청국장


‘청국장이라는 음식이 있다.’

이 문장을 읽은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이 쓴 문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청국장은 한국인인 나에게 그런 음식이었다.


나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은 청국장을 먹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청국장을 먹지 않았다. 여기서 내 국적에 의문을 표할 사람들에게 밝히자면, 나의 가계는 한국인이다. 옛날에 청국장은 먹지 않았지만 된장은 물론 먹었다. 고추장도.


내가 청국장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냄새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쯤 되었을 때 옆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음식 냄새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할머니께 여쭤보았더니 청국장 냄새일 거라고 하셨다. 그 첫 경험에서 나는 청국장을 내가 좋아하기 힘든 음식이라고 단정지었다.


그 후 20여 년 동안 청국장을 잊고 살았다. 적어도 몇 번은 그 냄새와 존재를 경험했겠지만 먹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첫 직장에서 청국장은 내 삶 깊숙이 들어왔다. 첫 직장에서 두 번째로 근무하게 된 부서의 책임자(국장)는 청국장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한 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국장님과 직원들이 같이 식사를 했는데, 메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청국장이었다. 


회사 가까이에 가정식 백반 집이 하나 있었는데 주 메뉴가 청국장이었다. 다른 메뉴도 있었겠지만 내 기억에는 없다. 그 국장님은 거의 매번 “이 청국장이 밥도둑이야”라면서 청국장 예찬을 늘어놓으셨다. 아울러 그 식당의 음식 솜씨도 덩달아 칭찬했다. 내 기억에서 처음으로 청국장을 먹어본 일이었다. 


어렸을 때의 경험과 다른 점이라면, 냄새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이십여 년 동안 청국장의 사회화가 진행된 때문인지, 아니면 그 청국장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청국장이 생소했지만 내가 먹지 않는 돼지고기보다는 1000배나 더 낫다고 생각해서 큰 불만없이 청국장을 먹었다.  


내가 그 식당의 청국장을 먹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두부 때문이었다. 그 청국장에는 두부가 많이 들어갔다. 나는 두부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래서 그 두부는 청국장에 대한 나의 거부감을 잠재우고도 조금 남았다. 또 청국장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된장 정도로 생각하니 못 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 부서에서 근무하다 부서를 옮기고 나서 나와 청국장의 인연은 다시 끊어졌다. 그 후 내가 일부러 청국장을 찾아서 먹지 않은 걸로 보아, 나는 청국장을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와 청국장과의 인연은 나름 질긴 모양이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온 후 집 주변의 한식당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된장-청국장 전문점이 하나 있었다. 식당 상호에 ‘향기’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어린 시절 나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그 냄새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향기일 수도 있는 모양이다. 


그 식당에 가면 아내는 대부분 청국장을 시킨다. 나는 된장찌개를 시키고. 그러면 나는 청국장 매니아였던 선배 국장을 떠올리며 아내의 청국장을 두어 숟가락 빼앗아 먹는다. 맛은 ‘국장 청국장’과 비슷하다. 두부는 조금 적게 들어가지만, 덩어리 진 콩이 씹히는 감각이나 된장찌개보다 덜 짠 것도 비슷하다. 특히나 목으로 넘길 때 느껴지는 쌉싸래한 맛은 아주 비슷하다. 어렸을 적 청국장을 자주 먹었다는 아내에게 물어보니 자기가 먹었던 맛과 비슷하다고 한다. 


자, 정리를 해보면 청국장이라는 찌개 음식에는 청국장과 김치 혹은 배추류의 야채, 그리고 다량의 두부 등이 들어간다. 된장과 발효식품 예찬론자가 아니라도 이 음식이 건강에 좋으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쓰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다 돼 간다. 사진도 찍을 겸 오늘 점심은 동네 ‘향기 식당’에 가서 청국장을 먹어봐야겠다.

청국장 냄새를 향기로 표현한 식당의 상차림. 아래가 청국장, 위가 된장.


청국장을 먹고 왔다. 커피도 한 잔 마셨고.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무슨 글이 이러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는 기승전결에서 기와 승 정도에 해당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직 안 나온 셈이다.


두어 달 전 나는 서울 경복궁 옆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분관에를 처음 가보았다. MMCA(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라는 영문 약어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가볼 마음을 누르고 지내왔다. 뉴욕의 MOMA(Museun of Modern Art)를 떠올리게 만든 영문 약어명과 디자인이 불편하게 느껴졌다.(그깟 디자인 때문에 미술관에 가지 않았다고? 편협한 인간!) 그건 그렇고. 이 미술관에 대해서는 언젠가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처음 갔던 날 나는 주변에서 식당을 찾지 못해 카페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삼청동까지 올라갔다 왔지만, 주차를 할 수 없었다 새우젓이 들어간 두부찌개를 잘 하는 집에도 가고 싶었지만, 그림의 두부였다. 


두 번째로 미술관을 찾은 날, 또 샌드위치를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술관에 주차한 후 인근을 뒤지기 시작했다.


먼젓 번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는 식당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한 순간, 골목 안쪽에 식당이 하나 눈에 띈다. 상호에 ‘청국장’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겠다. 대표음식을 상호에 내건 식당이라면 실패할 확률이 낮다는 생각 때문이다.


식사 메뉴는 대부분 청국장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약간의 변주가 있지만, 전체 범주는 청국장이다. 아내와 함께 청국장 백반을 시켰다. 위험 부담을 낮추기 위해 제일 낮은 가격의 메뉴를 선택했다.


먼저 반찬류가 나왔고, 청국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끓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반찬을 몇 가지 먹어보았다. 나물도 맛있고, 평범한 밑반찬인 어묵조림과 멸치볶음도 맛있다. 특히나 짜지 않으면서도 맛있게 느껴지니, 음식 만드는 사람의 내공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나의 할머니가 계셨다면, ‘슴슴하니’(*) 맛있다고 하셨을 듯하다.


기다리던 청국장이 나왔다. 앗! 이걸 두 사람이 다 먹는다고???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양이다. 이걸 어떻게 다 먹나 하며 아내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청국장 백반. 청국장의 위용(?)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하다. 상호를 없애달라는 까탈스런 내 요구에, 아내가 느닷없이 그릇에 꽃무늬를 그리느라 고생했다. 


한입 떠 먹어보았다. 이제까지 먹어본 청국장 가운데 가장 덜 짜다. 많이 먹을 수 있겠다. 두부도 직접 만든 두부같다. 씹을 때 맥없이 무너지는 두부들과는 조금 다르다. 두부 특유의 씹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청국장에서는 당연히 콩도 씹히지만 전체의 맥락 안에서 조화를 깨지 않는다. 끝으로 삼키는 맛. 쌉싸래함이 분명히 느껴지지만 강하지 않다. 냄새도 거의 없다. 어떤 방향으로든 진화가 끝난 메뉴 같다. 나는 나를 위해 만든 청국장 같다고 아내에게 떠들어댔다. 


식사가 끝났을 때 대접에는 청국장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밥의 양이 많아서 조금 남겼을 뿐이다. 나는 핸드폰에 이렇게 적었다. ‘태어나서 청국장을 가장 많이 먹은 날’. 누가 보면 청국장깨나 먹는 사람의 메모로 착각하겠다. 그리고 이 집을 기억하는 이유 또 하나. 누군가 먹던 반찬을 다시 쓰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밥을 다 먹고 계산을 하면서 다음에는 비싼 메뉴를 시켜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현대미술관에서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컬렉션 2탄으로 이중섭 전을 연다고 한다. 지난 번 이건희 전은 건너뛰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린 탓도 있고, 리움미술관을 찾아보았던 기억 때문에 건너뛰었는데 이번에는 가 보려고 한다. 인터넷 예약이 필수인 모양이다. 아내가 나섰다. 8월 마지막 주에 예약을 했다.


그날의 점심 메뉴? 물론 청국장이다.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걸 보니, 청국장과의 인연은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엄청난 사족을 하나 달자면, 청국장이라는 음식도 잘 먹는 나는 한국인이다. 


*제목 ‘청국장’ : 애초 글을 쓰려고 했을 때는 ‘태어나서 청국장을 가장 많이 먹은 날’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 하면 청국장 예찬이라는 게 다 알려지고 뭔가 김이 빠질 것 같았다. 그래서 초등학생 일기 같지만, 담백함이 살아있는 제목을 택했다. 청, 국, 장.

**슴슴하다 : 싱겁다의 방언. 전북 지역에서 주로 쓰는 모양인데, 내 조부모님은 평안도 분들이셨으니까 아마도 전국적으로 쓰인 단어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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