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서른 번째 날
어제저녁, 외식이 간절했다. 유독 머릿속에서 피자 생각을 떨칠 수 없는 날이 있다. 어제처럼.
“그냥 나가서 한끼 사 먹고 들어올까?”
그럴 수 없었다. 돈을 아껴야 했냐고?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며칠 전 장을 보러 가서 계란 60알을 구매했다. 갑자기 찾아온 새벽 손님 데니 때문에 너무 들떴던 걸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많은 계란을 샀는지, 본인조차 그 이유를 모르겠다. 마트에서 뒤돌아 나올 때 부터 후회 했지만, 다시 마트에 들어가 짧은 이탈리아어로 더듬더듬 환불을 요구하기 귀찮았다. 집에 와서 살펴보니, 설상가상 계란의 유통기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계란 먹어 치우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밤만 되면 닭이 몰래 우리 집에 들어와 알이라도 낳고 가는 걸까? 계란은 아침, 점심, 저녁, 간식으로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계란 한 알 한 알에 막중한 부담감이 붙어서 그런지, 계란이 더 늘어난 거 같은 착각도 들었다. 알록달록한 소파에 앉아 다채로운 ‘계란 활용 레시피’를 떠올려 보았다.
“마약 계란 장조림!”
그래. 이탈리아에서 지독하게 향기로운 한국의 마약을 만들어 보자. 그렇게 나는 외식을 포기하고 들뜬 마음으로 ‘계란 삶기 공장’의 부속품이 된 것처럼 꽤 오랜 시간 동안 계란을 삶고, 껍질을 깠다. 그렇게 약 55알 정도의 마약 계란 장조림 만들기 과정에 착수했다.
첫 시도였지만, 계란 장조림은 성공적이었다. 처음 한 판은 S가 가족들과 먹을 수 있도록 포장해다 주었다. 그리고 남은 간장에 두 번째 판의 계란들을 넣고 졸였다. 맛있게 졸여진 계란 중 반은 내 몫으로 남겨두고 반은 S의 누나네 집에 나눠 줬다. S의 조카들은 늘 내가 선보이는 생소한 한국의 맛을 좋아한다. 이탈리아에서 친구들에게 한국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면, 그들이 항상 물어보는 공통 질문이 있다.
“양념으로 어떤 걸 넣었어?”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궁금해한다. 막상 익숙한 양념 재료들을 듣고 나면, 생소하지 않은 재료로 오묘한 맛을 내는 것이 퍽 대단하다고 칭찬한다. 그럴 때면 ‘사실 한국 음식은 마늘을 많이 넣는 게 핵심이야.’라고 첨언하고 싶지만, 마늘이라 하면 질색하는 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비밀을 알려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숙제처럼 남겨진 계란을 알뜰하게 다 요리하고 난 다음 날인 오늘! 원하던 외식을 했다. 오늘 하루의 기억 속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갈로네로(GALLO NERO)의 해산물 스파게티를 저녁으로 먹던 때이다. 갈로네로로 이동하는 길에 문득 이탈리아에 즐겨 찾는 단골집, 그리고 그 단골집의 단골 메뉴가 있다는 건 참 특별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17시간가량을 날아 온 낯선 땅에도 다시금 즐겨 찾을 수 있는 식당이 있다니!
시르미오네에서 차로 15분 정도 이동하면 또 아주 예쁜 동네가 등장하는데, ‘라찌제(Lazise)’라는 동네이다. 물론, 노을에 물들면 쓰레기장도 운치있고 예쁘다. 하지만 라찌제는 노을은 유독 아름답다. 노을빛에 당당히 맞서 화사하게 제 색을 뽐내는 낡은 건물들, 가벼운 바람 따라 일렁이는 가르다 호수, 성당의 종소리와 어우러진 아코디언 연주 소리, 그리고 발코니에 기대어 서서 그 하모니를 듣는 사람들. 잠시 모네의 시선을 빌어, 이 아름다운 풍경을 인상주의 유화 감상하듯 눈에 담아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항상 라찌제를 찾을 때면, 좋아하는 식당(갈로네로)에 들러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숫가 부두에 앉아 노을을 즐긴다. 오늘도 그럴 참이었다.
라찌제의 ‘갈로 네로’라는 레스토랑은 지금까지 방문해 본 식당 중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스파게티를 만드는 식당이다. 이탈리아어 갈로(Gallo)는 수탉이라는 단어이고, 네로(Nero)는 검은색이라는 단어란다. 고로, 이 식당은 까만 수탉이라는 이름을 갖은 식당이다. 역시 사람은 본인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고, 이 집의 알로스꼴리오(해산물 스파게티)를 맛본 순간 수탉과 검은색이라는 이탈리아 단어를 단숨에 외워버렸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가르다호수 근방을 들러 볼 한국인이 있다면, 꼭 갈로 네로의 해산물 스파게티를 먹어 보길 추천한다. 이탈리아 사람에게는 조금 강한 듯한 마늘 향이 한국인의 입맛에는 딱 알맞다. 그릇 가장 안쪽에서 양념이 잘 묻은 면을 돌돌 말아 입 안에 넣는 순간 한국의 감자탕이 잊힌다. 식사 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마침내 전 애인의 흔적을 다 지워버린 사람은 이런 심정일까! 이제 더 이상 밤마다 감자탕을 떠올리며 괴로워하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