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어썸머 Apr 28. 2021

지난 일기


제주도라는 단어에 갖는 소회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섬이라는 하나의 수식이 주는 설렘은 모두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로 회의를 하던 중 우리는 갑작스럽게 제주도 촬영을 계획한다. 

물론 멀리 제주도까지 날아가 장소에 걸맞는 결과를 가지고 와야 한다는 압박에 시름거렸지만, 

그래도 바다라니.. 제주도라니.. 


출발 당일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일정은 기대에 묻은 약간의 피곤으로 시작했다. 

처음 가보는 공항은 아니었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막 상경한 군청 직원처럼 

각자의 짐들을 들고 두리번거렸다.

어색하지만 태연한 척 길게 늘어선 탑승 수속 줄에 서서 나는 앉고 싶었다.



비행기는 무사히 출발.

비행기 바퀴가 허공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땅에서 멀어질 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고 싶은 사람들을 잠깐 생각했다. 

혹시 무사하다면 (정말 그런 게 어딘가 있다면) '착하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다.


렌터카를 대여하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계획보다 조금씩 늦어지는 일정에 맘이 조급했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럴싸한 결과를 이쁜 펜션에 던져두고 보게 될 바다를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했다.

공항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촬영 장소는 '제클린'이라는 세탁소다. 

대표님의 지인이 운영하는 이곳은 집에서 하기 힘든 부피가 큰 세탁물이나 

제주를 찾은 여행객들이 배낭에 넣어둔 옷가지들을 들고 찾아오는 듯했다.

이곳의 특이한 점은 다른 여느 빨래방이나 세탁소와는 달리 세탁하는 공간 이외에 

다양한 콘셉트의 넓고 쾌적한 공간들이 마련돼있다. 


사장님의 배려로 이곳저곳에서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책을 읽으며 세탁물을 기다릴 수 있게 만든 공간에서 슬릭,

침대와 작은 화분들로 꾸며진 또 다른 공간에서 박소은,

세탁소 중앙에서 우주히피 순으로 진행된 촬영은 늦은 도착 시간을 감안했을 때 

아주 양호하게 마무리되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건 이동 시간이었다.

공항에서 렌터카 회사로, 거기서 장비 대여소로, 또 거기서 촬영 장소로.

촬영을 마친 후 가벼운 마무리 담소를 위한 카페로, 다시 촬영 장비를 반납하고, 

먼저 서울로 출발하는 감독님을 배웅하러 공항으로, 그리고 숙소로.


지친 몸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짐을 내려놓았을때 

바다는 예상하지 못한 추운 날씨와 어둠 뒤로 완전히 숨은 뒤였다.


고장 난 보일러로 서늘하고 낯선 숙소에서 이렇게 잠들 수 없다며 혼자 맥주를 홀짝거렸다.


바람이 많고 어둡고 아주 긴 밤을 지나 아침 일찍 근처 바다로 향했다.

모래바람 부는 제주의 아침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해변도로 옆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바다를 보았다.

안녕. 다음에 다시 올게.




제주 일정을 마치고 확실해진 건  내가 비행기를 무서워한다는 사실

그리고 나는 이제 서울 사람이 다 되었다는 사실이다.


짧게 마주한바다와 제주의 풍경들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지만

조금 서둘러 낯선 곳에서 집으로 멀어지고 싶었다.


by kookin

작가의 이전글 어느덧 4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