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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와우 Jan 09. 2023

겸손을 안다는 것.


겸손을 안다는 것.

 

 아버지는 내게 ‘항상 겸손 하라!’ 가르쳤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도 아버지의 가르침은 항상 머리를 맴돌게 하여 나를 경계하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스스로 ‘오만하지 않다’는 변명을 반복하며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분명해지는 것은 내가 겸손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나마 겸손함이란 의식만은 가지고 살아왔고 그런 이유로 오만함으로 인한 남들의 비난은 피할 수 있었다.


 성경은 감사함과 더불어 겸손을 강조한다. 신의 뜻에 따르는 덕목에는 순종의 미덕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 겸손을 요구했다. 아버지가 말씀한 겸손은 성경을 따르는 신에 대한 믿음의 방식이기도 하였다. 모든 종교가 그러한 것이지만 신에 대한 순종은 접하게 되는 모든 이들에게 겸손으로 대하여 이를 증명할 것을 생활 속에 요구한다. 겸손이 없는 관용과 측은지심은 진실성이 결여된 자기과시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잘난 사람이든 부족한 사람이든 자기오만은 삶을 지배한다. 어느 날 완장을 찬 순간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일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일이다. 남의 말에 귀기우리기를 멀리하고 자기주장과 감정에 몰두하는 것이 인간이고 보면 오만함은 항상 인간의 삶 가까이에 있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이유가 되기도 하고 자기변명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겸손은 때론 나약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약함과 겸손함은 겉보기에 같은 모습을 하는 경우도 많다. 겸손한 이가 받는 가장 큰 오해이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겸손할 수만은 없다. 겸허한 자세로 상대를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라는 교훈은 겸손의 방식을 말하고 있다. ‘겸허(謙虛)하다’는 잘난 체하거나 아는 체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낮추고 내세우지 않음을 의미한다.


 겸양지덕(謙讓之德)은 겸손하고 사양하는 미덕을 말한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 네 가지 선한 씨앗이 있다고 하였다. 그 중 하나가 겸양지심이다. 이는 유가의 큰 덕목으로 자리하였다. 맹사성(孟思誠, 1359~1438)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문신이다. 그는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이며 조부 맹유(孟裕)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순절했고 아버지 맹희도(孟希道)는 출사 없이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그는 조선조 500년사의 명재상으로 황희, 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8년이나 정승의 자리에 있었던 그의 집은 빗물이 새고 세간은 볼품이 없었다. 나들이 할 때는 언제나 소를 타고 다녀 백성들이 그가 재상인 줄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듯 겸양지덕은 검소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경우도 많다. 내가 찾던 것을 다른 이가 동시에 발견하고는 그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그것을 양보하는 경우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기묘한 듯 승리감에 가득 차 있어 보였다고 하자. 그 앞에 바로 서게 된다면 과연 경쟁사회에서 겸양지덕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모든 면에서 오늘날은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다. 입시경쟁이 그렇고, 취업경쟁이 그렇다. 국제간의 무역경쟁도 그러하다. 인간의 삶에 중요한 계기를 이루는 일들이 모두 경쟁을 통하여 이루어지니 겸양지덕을 베풀어야 할 공동체생활에 있어서도 자기 우선주의가 우선된다. 


 그러나 경쟁사회가 현대사회의 필연이라 하지만 선의의 경쟁은 있다. 그리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취했어도 그렇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한 경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에까지 경쟁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더더욱 없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사회가 지나친 경쟁심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여유가 결여되어 있는 탓이다. 자신이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면 겸양지덕이 우러날 수도 없다.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 물질적 여유를 누리고 있는 사회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 시대보다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함은 남들보다 많이 갖으려는 욕심이 경쟁으로 흐려진 탓이기도 하다. 겸양지덕을 우러나게 하는 여유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를 뜻하는 것임도 알아야 한다. 


 삶의 순간순간은 겸손해야 하는 것들을 흐려놓는다. 심지어 그 조차 변명의 수단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경우도 많다. 세상에 겸손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겸손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삶의 노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겸손한 삶에 대한 외부의 도전은 보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이다. 자기PR이나 자신감의 표현, 또는 자기주관, 생존본능 등과 같이 스스로의 정당한 행동과 마음에도 변병의 여지는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은 결국 오만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자기애와 이기심이 혼용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기오만과 자신감도 혼용되어져 있다. 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겸양의 자세에 있다면 조금은 설명이 되는 듯싶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도 불분명한 것이어서 인간의 겸양에 대한 노력의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만큼 현실 속에 겸손함을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린 시절 들었던 아버지의 ‘항상 겸손 하라’는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긴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함을 되새기는 이유가 되었다.  


 간혹 두려움이 겸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겸손은 때론 나약해 보일 수도 있다. 나의 삶에 대한 변명은 비겁함을 낳는 것이고 그것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을 살며 모든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두려움이 겸손으로 포장된다면 이 보다 더 비겁한 인생은 없다. 그렇게 보면 진정한 겸양의 미덕은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삶의 자신감은 욕망이 섞인 열정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 자기를 성찰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지혜를 구하는 자세에 있다.


 디지털 세상은 0과 1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 예와 아니오, 사실과 거짓, 선과 악... 등과 같은 이분법적 논리의 정형화이다. 그 곳에 우리의 정보를 저장하고 출력하여 사용한다. 디지털 세상의 발전은 세상을 정형화하여 속도를 높일 수 있는 기술을 더하여 발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현대과학만능주의의 실체를 알게 하는 것이고 최근까지 우리의 생활과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을 다시 새롭게 발견한다. 그것이 양자역학의 세상이다. 자연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은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


 인간의 모든 마음의 상태는 양자역학의 중첩상태와 같다. 그것은 악인과 선한 사람이 동시한다는 말이고 중첩된 상태로 인간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더 나아가 남녀의 본질적 특성이 분명함에도 동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남녀평등의 가치와 당위성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양자역학을 이해한다면 세상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인식이 자연과학에도 자연스럽게 투영될 수 있다. 그러면 복잡한 양자역학의 이론도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사유를 통해 최초로 규명되었다는 사실에도 그 놀라운 철학적 인식의 세계에 접근하는 단초가 된다. 세상의 질서도 그러한 것이지만 인간 개개인의 상태도 이러한 중첩된 상태에 있는 것이기에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에도 올바른 방향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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