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와우 Mar 20. 2023

열심히 산다는 것

열심히 산다는 것

 

 누구나가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스스로 그랬다고 자신하는 경우는 많지만 정말 그러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정도의 문제이고 그 기준을 정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보다...’라는 상대적 기준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에는 자기 합리화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이는 겸손의 기준을 정하는 이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죽음이 다가오는 인생의 황혼에서 뒤를 돌아보며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고 회고하기를 소망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인생을 소망하는 것도 켜켜이 쌓인 삶의 모습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보면 삶에 주어진 순간순간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 되고 그 순간 자신의 과오도 소중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그러한 과오가 자기합리화의 함정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열심히 산다는 것에는 후회와 자기반성도 수반된 일이다. 


 누구나 한번쯤 물러나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 참으로 열심히 산다는 것이 보인다. 생존의 목적이 어떠하든 생존의 몸부림이 함께 얽히며 역동성을 갖기도 하며 그러한 모습들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는 낙담에 젖는 순간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회오리에 휩쓸리며 자신도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학교생활을 하던 꿈 많은 청소년 시절도 그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회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는 순간들도 그랬다. 그러나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하면 삶의 기준이 분명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이 삶의 위안이 되기도 하고 그 성취정도가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목적도 허상이 되어버리면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도 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더욱이 그것이 반복되어 나타나면 삶의 허무를 느끼는 것은 필연이다. 인간을 위협하는 이러한 병적 상태도 삶에는 하나의 과정이다.


 삶은 인간에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이 생존을 위해 땅만 보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고 멀리 있는 수평선 너머에 있는 소망을 꿈꾸며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만을 위해 ‘열심히 하였다’는 사실이 ‘열심히 살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에는 ‘잘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봉사와 희생의 삶을 얼마나 ‘실천 하였느냐?’로 귀결되고 있다. 작게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이 속한 사회에 관심과 참여 그리고 봉사와 희생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부모에 대한 효도도 자신의 작은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주변 친구들에 대한 이해도 관심과 배려에서 시작된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 ‘부자는 천국에 이르기 어렵다.’ 모두가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일이지만 이러한 부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부자가 되기 위해 주변을 희생시키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가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예가 하나 있다. 경주 최부자의 이야기다. 이 가문의 이야기는 조선 시대 무관 최 진립 장군에서 독립운동가 최 준 선생에 이르는 400년의 역사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최 진립의 셋째 아들 최 동량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여 경주일대의 토지를 개간하고 형산강의 물줄기를 기반으로 이양법을 도입하였고 400년에 걸친 부를 축척하여 나갔다. 최 진립의 손자이자 최 동량의 장남인 최 국선이 명화적이라 불리는 도적떼의 침입을 받게 되어 이를 교훈삼아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마음가짐으로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이는 대를 이어 '경주 최부잣집'의 명성으로 이어진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흉년 때 지주들이 다급한 처지의 농민들의 땅을 싸게 사들여서 재산을 불렸다. 그리고 노비는 재산증식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오히려 최부잣집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는 가훈을 세웠다. 그리고 집안의 재산은 1만 석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한다고 규정했는데 이렇다보니 집안의 소유 토지가 늘어나더라도 1만 석을 넘을 수 없으니 그 남은 이익이 자연스럽게 소작인들에게 돌아가는 구조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일대의 주민들은 오히려 최부잣집의 재산이 늘어나기를 원했고 누군가가 땅을 매각하려 한다면 앞 다퉈서 최부잣집에 소개할 정도였다. 경영학적으로 본다면 이윤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일정 수준의 이윤을 유지하면서 지역주민들의 신망을 얻는 경영방식을 채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신망이 최부잣집이 무려 12대 400여 년을 이어오며 부를 지키는 근간이 된 것이다. 


 12대 최준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었다. 최준은 가문의 전 재산을 털어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에 경주군 대표로 참여해서 자금을 기부했고 이로 인해 1년여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1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조선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이곳에 명단을 올리기도 했다. 이 무렵에 백산 안 희제를 만나 안 희제의 제안으로 백산상회에 투자라는 형식을 빌려 독립운동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기부했다. 또한 최 준의 동생들도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최 준의 동생 최 완은 일제의 모략에 말려들어서 국내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결국 옥사했다. 해방 이후 백범 김 구가 최 준을 만나서 최 준이 보내준 자금을 독립운동에 소중히 사용했다고 감사를 표했으며 최 준은 백산 안 희제를 떠올리며 그 자리에서 안희제의 고향인 경남 의령 방향으로 절을 했다고 한다. 최 준은 해방 이후에 나라의 미래가 자신의 모든 재산과 선조의 명예를 지속시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교육 사업에 남은 전 재산을 털어 현재의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웠다. 이후 대구대학은 박정희 시절 영남대학으로 통합되었고 재단의 창업자의 이름에서조차 사라지게 된다. 학교재단의 주인 역시 바뀌었고 역사에만 이름이 남았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이러한 것일 것이다. 사람은 메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주어진 상황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들이다. 그 순간 누구나 깨닫게 되는 것이 인간이고 보면 깨달음의 순간 행동할 수 있는 의지가 인간을 ‘열심히 산다.’는 것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삶의 노력은 삶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고 삶에 대한 억척스러움도 하나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깨달음의 과정을 말한다.


 쇼펜하우워는 자살이 인간의 권리라고 말한다. 신이 중심이 되었던 사회에서 인간의 선택을 강조하던 당시를 생각하면 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지는 그 많은 삶의 시련과 아픔 속의 병적 상태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 삶을 포기한 자의 선택이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살아있음은 그 자체가 열심히 사는 것이다. 아니 그 자체가 열심히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가 갖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자유로운 인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이해하는 것에 있으며 함께하기 위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이유는 다른 삶의 모습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에 있다.

작가의 이전글 철인정치와 민주주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